나무와 관상
나무와 관상
by 운영자 2013.10.14
영화 관상이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관상이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것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무엇보다도 한국 사람들이 관상 자체에 관심이 많은 민족이기 때문이다.
관상은 얼굴을 보는 것이다. 한국 사람은 사람관계에서 첫 인상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관상은 일찍부터 사람을 이해하는데 큰 몫을 담당했다. 심지어 세간에 대기업에서 관상으로 사람을 뽑는다는 설까지 나돌 정도이다.
이러한 설이 설령 소문에 지나지 않더라도 그만큼 관상이 중요하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영화 관상은 조선시대 수양대군과 김종서를 둘러싼 권력투쟁과 얽혀 재미를 더하고 있지만, 자칫 관상을 운명으로 받아들일 소지도 없지 않아 뒷맛이 개운하지 않다.
관상이 결코 인간의 운명을 결정하지 못한다는 것은 인간의 얼굴이 언제나 바뀌기 때문이다.
만약 사람의 얼굴이 바꾸지 않는다면, 오로지 태어난 대로 죽을 때까지 계속된다면, 그 모습이 사람의 운명을 결정한다면, 인간의 삶은 그 자체로 비극이다.
인간의 운명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 그래서 관상가는 인간의 미래를 결코 정확하게 예견할 수 없다. 다만 얼굴을 통해 인간의 과거를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관상의 ‘상(相)’은 ‘나무를 본다’는 뜻이다. 나무를 본다는 글자가 사람의 얼굴을 의미하는 글자와 같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나이테가 나무의 삶을 온전히 담고 있는 것처럼 얼굴도 사람의 삶을 온전히 담고 있다.
그래서 사람의 얼굴을 보면 그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의 얼굴을 대충 보면 잘 모른다. 얼굴을 자세히 보는 것이 관상이다.
사람들은 매일 자신의 얼굴을 보지만 자세히 보지는 않는다.
여자는 남자보다 훨씬 자신의 얼굴을 자세히 보지만, 대부분 얼굴이 예쁜지의 여부에 큰 관심을 가진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얼굴을 예쁘게 만들까 걱정하면서, 특히 얼굴의 주름을 어떻게 하면 적게 만들까, 혹은 없앨까를 고민하는데 시간과 돈을 투자한다.
세상에 나쁜 관상은 없다. 오로지 좋은 관상만 존재할 뿐이다. 세상에 좋은 관상만 존재하는 것은 인간이든 다른 생명체든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 좋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좋지 않는 상태로 태어나는 존재는 없다.
다만 사람들이 자신이 좋은 존재라는 것을 모를 뿐이다. 만약 처음부터 좋은 관상이라고 믿고 자신의 얼굴을 본다면, 분명 좋은 점을 발견할 것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자신이 좋지 않는 관상이라 믿는다면, 좋지 않는 점을 찾을 것을 것이다. 행복과 불행은 자신의 얼굴을 어떤 관점에서 보는가에 달렸다.
나무는 자신이 좋은 관상인지 나쁜 관상인지를 생각하지 않는다. 나무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자신의 능력을 어떻게 발휘할까만 생각한다. 나무가 인간에게 칭찬받는 이유도 바로 이러한 삶의 태도 때문이다.
지금도 어디선가 자신의 관상을 탓하면서 병원을 기웃거리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아무리 좋은 병원을 찾아 자신의 얼굴을 고치더라도 그 사람의 미래는 밝지 않다.
혹 돈을 잘 벌면서 살아가는 성형한 연예인들을 부러워할지 모르지만, 성공한 연예인들을 성형 덕분이라 믿는다면 오해이다.
성공은 성형이 아니라 나무처럼 치열한 삶을 통해서 이루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형으로 무너진 사람을 꼭 기억할 일이다.
<강판권 교수>
관상은 얼굴을 보는 것이다. 한국 사람은 사람관계에서 첫 인상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관상은 일찍부터 사람을 이해하는데 큰 몫을 담당했다. 심지어 세간에 대기업에서 관상으로 사람을 뽑는다는 설까지 나돌 정도이다.
이러한 설이 설령 소문에 지나지 않더라도 그만큼 관상이 중요하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영화 관상은 조선시대 수양대군과 김종서를 둘러싼 권력투쟁과 얽혀 재미를 더하고 있지만, 자칫 관상을 운명으로 받아들일 소지도 없지 않아 뒷맛이 개운하지 않다.
관상이 결코 인간의 운명을 결정하지 못한다는 것은 인간의 얼굴이 언제나 바뀌기 때문이다.
만약 사람의 얼굴이 바꾸지 않는다면, 오로지 태어난 대로 죽을 때까지 계속된다면, 그 모습이 사람의 운명을 결정한다면, 인간의 삶은 그 자체로 비극이다.
인간의 운명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 그래서 관상가는 인간의 미래를 결코 정확하게 예견할 수 없다. 다만 얼굴을 통해 인간의 과거를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관상의 ‘상(相)’은 ‘나무를 본다’는 뜻이다. 나무를 본다는 글자가 사람의 얼굴을 의미하는 글자와 같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나이테가 나무의 삶을 온전히 담고 있는 것처럼 얼굴도 사람의 삶을 온전히 담고 있다.
그래서 사람의 얼굴을 보면 그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의 얼굴을 대충 보면 잘 모른다. 얼굴을 자세히 보는 것이 관상이다.
사람들은 매일 자신의 얼굴을 보지만 자세히 보지는 않는다.
여자는 남자보다 훨씬 자신의 얼굴을 자세히 보지만, 대부분 얼굴이 예쁜지의 여부에 큰 관심을 가진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얼굴을 예쁘게 만들까 걱정하면서, 특히 얼굴의 주름을 어떻게 하면 적게 만들까, 혹은 없앨까를 고민하는데 시간과 돈을 투자한다.
세상에 나쁜 관상은 없다. 오로지 좋은 관상만 존재할 뿐이다. 세상에 좋은 관상만 존재하는 것은 인간이든 다른 생명체든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 좋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좋지 않는 상태로 태어나는 존재는 없다.
다만 사람들이 자신이 좋은 존재라는 것을 모를 뿐이다. 만약 처음부터 좋은 관상이라고 믿고 자신의 얼굴을 본다면, 분명 좋은 점을 발견할 것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자신이 좋지 않는 관상이라 믿는다면, 좋지 않는 점을 찾을 것을 것이다. 행복과 불행은 자신의 얼굴을 어떤 관점에서 보는가에 달렸다.
나무는 자신이 좋은 관상인지 나쁜 관상인지를 생각하지 않는다. 나무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자신의 능력을 어떻게 발휘할까만 생각한다. 나무가 인간에게 칭찬받는 이유도 바로 이러한 삶의 태도 때문이다.
지금도 어디선가 자신의 관상을 탓하면서 병원을 기웃거리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아무리 좋은 병원을 찾아 자신의 얼굴을 고치더라도 그 사람의 미래는 밝지 않다.
혹 돈을 잘 벌면서 살아가는 성형한 연예인들을 부러워할지 모르지만, 성공한 연예인들을 성형 덕분이라 믿는다면 오해이다.
성공은 성형이 아니라 나무처럼 치열한 삶을 통해서 이루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형으로 무너진 사람을 꼭 기억할 일이다.
<강판권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