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김장과 전통

김장과 전통

by 운영자 2013.12.02

겨우내 먹을 김치를 한목에 담가두는 일, 김장은 한국인들의 겨울 삶을 유지시켜주는 중요한 행사이다.

그래서 한국인의 겨울 양식 중 절반을 차지할 만큼 큰 비중을 차지하는 김장은 늦가을과 초겨울의 축제였다.

그러나 지금은 김장을 직접 마련하는 가정이 줄면서 행사의 중요성도 점차 줄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김장을 언제 시작했는지에 대한 기록은 정확하지 않지만, 무를 절였다는 『동국이상국집』이나 채소 가공품을 저장하는 ‘요물고(料物庫)’에 대한 기록으로 보아 적어도 고려시대부터 있었다.

조선시대에 이르면 『동국세시기』에 봄과 겨울의 장담기가 일 년의 계획이라는 언급과 『농가월령가』의 『시월령』의 김장하기 등의 기록으로 보아 김장은 점차 전국적인 풍속으로 자리 잡았던 것으로 보인다.

나는 올해 마지막으로 고향에서 김장했다. 지금까지 김장은 고향에서 이루어져 그저 가져오기만 했을 뿐이다. 모두 부모님이 장만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연세가 많은 어머니는 더 이상 김장을 할 수 없다.

이번 김장이 마지막이라 생각하니 가슴이 멍했다.

김장하는 날, 돼지고기를 사서 부모 형제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냈지만, 짐을 챙겨 집으로 돌아오는 시간 내내 김장하던 어머니의 모습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어머니는 당신의 몸조차 잘 가누지 못하면서도 4형제의 김장을 마련하느라 며칠 동안 김치와 무를 준비하고, 그 날은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김치를 장만하고 계셨다.

나는 겨우 11시 경에 도착해서 조금 거들고 집으로 돌아왔을 뿐이다.

이제 나도 김장철에 고향에서 부모와 가족이 함께 하는 행복을 기대할 수 없다. 김장 풍속이 사라지는 것은 한 세대가 끝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나의 세대에도 부모세대처럼 사람들과 만나서 김장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고향에서 부모 형제와 함께 하는 김장 풍속은 이제 당분간 볼 수 없다.

나의 자식들은 더더욱 김장에 관심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김장의 전통이 계속 이어지지 못하는 것은 아쉬운 일이다.

그러나 김장의 전통도 어느 시점에서 생긴 것처럼 언젠가는 사라지는 것도 순리이다. 김장의 전통은 사라지지만 다른 형태의 전통으로 남을 것이다.

생성과 소멸은 자연의 법칙이자 순리이다.

그러나 한 포기의 배추가 고춧가루와 마늘 등과 만나서 한국인의 식탁을 풍성하게 만드는 음식문화는 쉽게 소멸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몸속에 김치를 받아들이는 유전자가 깊게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고향 집 옆의 터 밭에 감칠맛 나는 배추와 무를 볼 수 없다는 생각에 마음이 시리다.

터 밭은 1세기 가까운 세월 동안 부모님과 4형제의 삶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곳이다.

그러나 추억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아무리 터 밭에 배추와 무가 없더라도 그곳엔 언제나 배추와 무가 있는 것과 같다.

내 마음 속에 자리 잡은 터 밭의 추억은 죽을 때까지 사라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 인간이 살았던 공간은 추억의 시간을 품고 있다. 공간이 사라지지 않는 한, 추억은 언제나 땅 속에서 맛 좋게 발효한다.

그래서 내년에도 김장철에 고향을 찾으면 텅 빈 터 밭도 아름다울 것이다.

<강판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