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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주가와 건배사

권주가와 건배사

by 운영자 2013.12.06

선조들은 권주가로 주흥을 즐겼다.

대표적인 권주가는 송강 정철의 ‘장진주사(將進酒辭)’다. ‘한 잔 먹세 그려, 또 한 잔 먹세 그려. 꽃 꺾어 산(算) 놓고, 무진 무진 먹세 그려’는 풍류와 멋이 차고 넘친다.

술꾼들이 술 마시는 명분을 만들듯 송강도 술을 즐기는 네 가지 이유, 기주유사(嗜酒有四)를 만들었다.

첫 번째 이유가 불평일야(不平一也)로 마음이 편치 못할 때 마신다.

두 번째가 우흥이야(遇興二也) 흥에 겨워 마시고, 세 번째는 대객삼야(待客三也) 손님접대를 위해 마신다는 것. 네 번째 이유가 걸작이다.

난거인권사야(難拒人勸四也)로 권하는 잔을 뿌리칠 수 없어 마신다니 핑계치고는 절묘하다.

현실과 이상의 갈등을 술로 달랬던 송강은 46세 때 술을 끊었다. ‘누가 내게 즐기던 술 왜 끊었느냐 묻는다면/ 술에 묘함 있는 줄을 몰라 끊었다고 하리/ 내가 어른 된 이후로 지금까지 삼십 년간/ 아침 저녁 시시 때때 술잔 들어 마셨건만/ 내 맘 속의 시름 아니 없어지고 그대로니/ 술에 묘함 있다는 말 나는 믿지 않는다네.’ 술은 시대의 아픔과 근심걱정을 잠시 잊게 해 줄 뿐 묘약이 아님을 뒤늦게 깨달았다.

권주가는 도도한 취흥의 저변에 한과 슬픔이 서리어 있다. ‘장진주사’도 따지고 보면 술로써 인생무상을 위무한 노래다.

‘명사십리 해당화야 꽃 진다고 설워 마라. 명년삼월 봄이 오면 너는 다시 피려니와 가련하다 우리 인생∼’ 어릴 적 잔치 집에서 많이 듣던 토속적인 권주가도 낭창낭창한 즐거움 속에 비장함이 스며있다.

‘마시자, 마시자’로 시작되는 베르디의 오페라 곡 ‘축배의 노래’도 신명나는 흥겨운 가락이지만 두 주인공의 엇갈린 운명의 예고다.

술자리가 잦은 12월, 피할 수 없는 게 건배사다. 돌아가며 한 사람씩 건배사를 하는 자리가 많다보니 은근히 신경 쓰인다.

건배사 모음 책이 있는가하면 건배사를 모은 ‘치어 업 건배사’ ‘스토리 건배사 100’ 같은 스마트폰 응용 앱까지 등장했다.

건배사는 술잔 속에 빛나는 센스다.

유머가 담긴 따뜻한 메시지로 일사불란하게 잔을 부딪치게 만든다는 게 녹록치 않다.

노년들 술자리에서 따끈따끈한 건배사라며 ‘명품백’(명퇴조심, 품위유지, 백수방지)이나 ‘멘붕’(만날 붕붕 뜹시다)을 외치면 “치매 끼 있는 것 아니냐”고 핀잔받기 십상이다.

‘구구팔팔이삼사’(99세까지 팔팔하게 살다가 이틀만 앓고 사흘 만에 죽자)와 ‘빠삐따’(모임에 빠지지 말고 삐치지 말고 따지지 말자)는 신라시대 건배사로 구닥다리 취급 받는다.

분위기에 걸맞는 건배사가 어려운 이유다.

인터넷을 검색하다보니 “술잔은 비우고∼”라고 외치면 “마음은 채우고~”로 화답하는 건배사가 솔깃하게 와 닿는다.

대구(對句)와 운율이 어울린다. ‘마당발’(마주 보는 당신의 발전을 위하여)도 무난해 보인다.

건배사 보다 중요한 건 절주의 미학이다. 흥청망청 마시다보면 이성(理性)이 비틀거리게 된다. ‘꽃은 반만 피었을 때 가장 아름답고 술은 적당히 취했을 때 가장 아름답다’는 ‘채근담’의 명구를 되새기며 술자리에 나가자.

<이규섭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