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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인장에 앉은 잠자리

선인장에 앉은 잠자리

by 운영자 2013.12.16

세찬 바람에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진다. 이즈음 집 베란다 에어컨 실외기 위의 선인장도 집안으로 들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얼어서 죽기 때문이다.

베란다 밖에 살던 선인장은 붉다.

그러나 선인장이 집안으로 들어오면 점차 붉은 색은 사라진다. 그만큼 강인한 성질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어느 날, 집 베란다 선인장에 잠자리 한 마리가 앉았다. 잠자리는 왜 집 베란다에 잠자리를 마련했을까. 추위 탓이리라.

이 계절에 우리나라의 모든 생명체는 추위를 준비한다.

어떤 생명체는 동면하고, 어떤 생명체는 옷을 준비하고, 어떤 생명체는 피부를 두껍게 만든다. 이처럼 각각의 생명체는 저마다 살아가는 방식을 갖고 있다.

잠자리는 벌써 후손을 남기고 생을 마감해야 하지만, 선인장에 앉아 있다.

잠자리의 잠자리가 선인장으로 바뀐 것은 적어도 그곳이 자신이 머물 수 있는 공간이라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잠자리의 잠자리를 걱정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나는 어떤 경우에도 잠자리의 삶에 도움을 줄 수 없기 때문이다.

잠자리는 조용필의 노래 ‘고추잠자리’를 비롯해서 세계 각지에 5000여종이 있고, 우리나라에도 100여종이 살고 있다.

나는 어린 시절 5∼6월부터 나뭇가지에 거꾸로 매달린 채 우화(羽化)하고, 11월까지 성충을 볼 수 있는 고추잠자리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련하다.

들이나 마당에서 일을 하다가 하늘을 보면 고추잠자리는 서로 엉켜 빙빙 돌고 있는 장면을 목격한다.

고추잠자리는 하늘에서 짝짓기를 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고추잠자리처럼 하늘에서 짝짓기 하는 생명체는 많지 않다.

꼬리가 붉어서 붙여진 고추잠자리가 하늘을 빙빙 도는 장면은 농부들이 힘든 몸을 잠시나마 쉴 수 있는 멋진 장면이다.

고추잠자리가 하늘을 빙빙 도는 시간에 마당에는 붉은 고추가 마른다.

그러나 지금은 고추를 마당에서 말리는 모습도 찾아보기 어렵고, 고추가 햇살에 말라가는 시간에 하늘에 날고 있는 고추잠자리를 보는 풍경도 드물다.

세월이 흐르면서 어린 시절 경험한 장면들이 하나씩 사라지고 있는 순간을 맞는다.

그러나 어떤 것이든 영원히 존재하는 것은 없다. 세월이 흐르면 사라지는 것이 자연의 순리이다. 사라진 것들의 자리에는 새로운 것이 다시 찾아오는 법이다.

도시생활에서 잠자리를 집 안에서 보는 것은 흔하지 않다. 집안에서 잠자리를 보는 것은 반갑지만, 베란다는 잠자리가 머물 곳이 아니다.

잠자리가 베란다로 들어온다는 것은 그만큼 밖의 터전이 좋지 않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베란다 선인장에서 잠자리를 보는 것은 무척 가슴 아픈 일이다.

생명체는 상황에 따라 어디든 삶의 터전을 마련해야 하지만 가장 적합한 공간에서 살아가는 것이 행복이다. 나의 행복만큼 잠자리의 행복도 중요하다.

그러나 잠자리의 행복은 잠자리가 책임질 수밖에 없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잠자리의 행복이 곧 인간의 행복과 직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내년에는 잠자리의 행복을 위해서 베란다 선인장에서 볼 수 없길 바라지만, 혹 다시 찾아온다면 기꺼이 반갑게 맞을 일이다.

내게 찾아오는 손님을 내칠 자격도 없지만, 혹 고향에서 본 잠자리의 후손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강판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