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적석(積石)과 적선(積善)

적석(積石)과 적선(積善)

by 운영자 2014.02.06

<강판권목사>- 성지감리 교회 담임목사
- 흙과 농부와 목자가
만나면의 저자


지혜로운 사람은 쌓으면서 버리고, 어리석은 사람은 쌓을 줄만 알고 버릴 줄 모른다.

산에 오르다보면 자주 돌탑을 만난다. 나도 간혹 다른 사람들이 쌓은 돌탑에 돌 하나 얹는다.

얼마 전 인근 산에 오르니 그간 못 보던 여러 개의 돌탑이 있었다. 어떤 것은 완성했지만 어떤 것은 미완성이었다.

한 사람의 작품으로 보이는 돌탑이 한 개도 아니고 여러 개가 생긴다는 것은 절박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주위의 돌로 여러 개의 돌탑을 쌓는데 상당한 시간과 공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왜 돌탑을 만들까. 돌이든 뭔가를 쌓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돌탑에는 쌓는 사람의 ‘기원’과 ‘믿음’이 깔려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자신들의 기원과 믿음을 쌓는 방식으로 드러낼까.

인간이 무생물인 돌에게도 자신의 기원과 믿음을 반영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뭔가를 쌓는 데 의미를 부여할지도 모른다.

돌을 쌓는 사람은 스스로 선을 쌓는다고 생각할 것이다. 돌을 하나하나 쌓을 때마다 선이 쌓이면 자신의 미래가 밝을 것이라는 믿음이 없다면, 굳이 돌을 쌓지도 않을 것이다.

쌓으면 좋은 일이 생길 것이라는 믿음이 반드시 좋은 결과를 낳는 것은 아니다. 돌탑만 하더라도 끝도 없이 쌓을 수는 없다. 돌탑은 어느 순간 멈춰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공든 탑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뭔가를 쌓는 것은 끊임없이 뭔가를 바라는 욕망의 산물일 경우도 많다.

그래서 오히려 쌓지 않는 것이 미래를 밝게 만들 때도 많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쌓지 않으면 허전하거나 불안해서 견디지 못한다.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서 돌탑을 쌓거나 뭔가를 바라는 마음에서 쌓는다면 결코 불안은 해소할 수 없다. 뭔가를 쌓는 순간은 불안을 잠시 해소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영원히 불안을 없앨 수는 없기 때문이다.

버린다는 것은 사라지는 것과 다르다. 이 세상에 사라지는 것은 없다.

다만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다. 돌탑을 쌓는 것은 관계의 문제이다. 인간은 편안한 삶을 위해 다양한 대상과 관계를 맺는다.

그런데 관계의 결과는 자신의 태도에서 결정된다. 돌탑도 어떤 사람의 태도의 결과이지 돌탑 그 자체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돌이 돌탑을 쌓는 사람에게 뭔가를 줄 수 없기 때문이다.

불교신자들은 돌과 금속으로 만든 부처님에게, 기독교 신자들은 돌과 금속으로 만든 예수님에게 자신의 소망을 빈다.

그러나 돌과 금속으로 만든 부처님과 예수님이 소망을 비는 사람들에게 뭔가를 줄 수는 없다.

산에서 돌탑을 만나 돌 하나를 얹다가 혹 탑이 무너질까 불안한 마음을 가질 때가 있다.

돌탑이 무너진다고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는데도 그런 마음을 갖는 것은 돌이 어떤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라 돌을 쌓은 사람들의 마음을 해칠까 두렵기 때문이다.

돌은 무생물이지만 돌을 쌓는 사람은 생물이다. 쌓든 버리든 생물의 행위에 대한 평가에 따라 행운과 불행이 결정된다.

돌을 쌓는 적석과 선을 쌓는 적선은 돌 하나를 얻는 순간의 마음에 따라 자신에게 돌아가는 것도 결정된다. 나는 “너에게서 나온 것은 너에게로 돌아가리라”고 한 중국 춘추시대의 유학자 증자의 말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