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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마무리

아름다운 마무리

by 운영자 2014.02.07

“결국 갔군!” 지난 크리스마스 아침, 언론계 지인의 부음을 듣고 탄식이 신음처럼 터졌다.나이도 순서도 없이 홀연히 맞이하는 게 죽음이지만 고령화시대에 칠순도 넘기지 못해 아쉽고 짠하다.

독실한 크리스천인 그가 성탄절 아침에 하늘나라로 갔으니 축복이라 위로해 본다. 먼저 떠난 아내와 재회하고 바둑으로 우의를 다졌던 옛 동료와 대국을 즐길 수 있기를 바랄뿐이다.

서울대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고인은 신문기자로 활동했으나 80년대 군사정권의 언론통폐합에 따라 해직되는 비운을 겪었다.

1988년 신생 언론사 창간 때 그와 만났다. 훤칠한 키에 무골호인의 선비로 워싱턴특파원과 국제부장을 지냈다.

퇴직 후 결성한 정기모임을 통해 세상사는 이야기를 나누며 여행도 다녔다. 몇 해 전 아내를 저 세상으로 보낸 뒤 건강에 이상 신호가 왔다.

서울서 혼자 지내다 손자도 돌볼 겸 대학병원에 근무하던 부산 큰 아들에게 간지 3년 만에 이승을 하직했다.

연말 바쁜 일정 탓도 있지만 마지막 떠나는 길 조문을 못한 것이 체증처럼 가슴을 짓누른다.

‘정승댁 개가 죽으면 문상객이 오는데 정승이 죽으면 문상 오는 사람이 없다’는 옛말을 절감한다.

더구나 그가 회원으로 가입한 언론인단체에도 알리지 못하는 결례를 저질렀다.

그 단체에서 ‘언론인장’제도를 도입한 건 망자에 대한 배려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는 현수막을 걸고 조화를 바치고, 고인에 대한 추도사를 한 뒤 소정의 조의금을 전달하는 의례다.

언론현장에서 치열하게 살았음을 자식들에게 알린다는 의미도 있다.

뒤늦었지만 언론인단체에 알려 장남에게 조의금을 전달하는 절차를 주선했다. 아들에게 연락하여 장례식장 사진을 전송받았다.

고인의 약력을 쓴 뒤 워싱턴특파원 시절 가족끼리도 가깝게 지냈던 회원에게 추도문을 의뢰했다. ‘천하무봉의 자유인(Le libre)으로 평생을 과객처럼 사셨던 000 형, 이제 그곳 본향(本鄕)에서 편히 쉬시구려!’.

최근 회보에 게재하여 기록으로 남겨 죄스러운 마음을 조금은 덜었다.

예고 없이 찾아오는 죽음에 대한 준비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동료의 타계 전 날 숨진 여든다섯 살 노인의 장례식 기사도 자극이 됐다. 부음(訃音)도 꼭 알릴 사람에게만 알려 빈소가 차분하고 단촐 했다.

수의(壽衣) 대신 평소 즐겨 입던 양복에 넥타이를 매고 가장 값싼 관(棺)에 실려 화장장으로 떠났다.

숨지기 며칠 전 아들에게 건넨 ‘사전장례의향서’대로 치른 첫 사례다.

“그래, 유산이 있어 유언장을 쓸 처지도 아니니까 장례절차라도 검소하게 지내라는 ‘장례의향서’라도 남겨야 겠다”고 다짐한다.

사전장례의향서 쓰기는 시민단체 한국골든에이지포럼이 벌이는 캠페인으로 2년 새 1만여 명이 동참했다.

우리 장례문화는 남의 눈을 의식해 부모 장례를 번듯하게 치러야 자식 된 도리라고 여긴다.

비용과 형식, 절차 등 지나치게 겉치레가 많다. 장례를 간소하게 치러달라고 서면으로 당부해두면 자식도 부담을 덜 수 있다.

석양을 향해 질주하는 황혼인생의 길목에서 죽음을 준비하면 삶도 아름답게 마무리 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