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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삶은 소풍이다

현 삶은 소풍이다

by 운영자 2014.02.11

‘테헤란의 죽음(Death in teheran)’이란 이야기가 있다.

페르시아의 경제적으로 부유하고 권세 있는 부자가 하루는 하인 한명을 거느리고 정원을 거닐고 있었다.

이때 갑자기 하인이 비명을 질렀다.

주인은 왜 그러느냐고 자초지종 묻자, 하인은 ‘방금 죽음의 신과 마주쳤는데 자신을 데려 가겠다’고 위협하였다고 한다.

말을 끝내고 하인은 주인에게 ‘주인의 가장 빠른 말을 빌려 달라’고 다급하게 애원했다.

말을 빌려 주면 그 말을 타고 오늘밤 안으로 도달할 수 있는 테헤란으로 도망을 치겠다는 것이다. 주인은 순순히 승낙하고 자신의 말을 빌려주었다.

하인이 허겁지겁 말을 타고 떠난 뒤, 주인은 발길을 돌려 집안으로 들어가는데 마침 죽음의 신과 마주치게 되었다. 그래서 주인은 죽음의 신에게 따지듯이 물었다.

“왜 그대는 나의 하인에게 겁을 주고 위협까지 하느냐?”

“저는 그를 위협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오늘 밤 테헤란에서 그와 만나기로 계획을 세워 놓았는데 아직도 그가 이곳에 있는 것을 보고, 단지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을 뿐입니다.”

아무리 도망치려고 하여도 그 죽음은 언젠가는 찾아오기 마련이다.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필연적인 손님이다. 독일 시인 릴케는 ‘인생이란 죽음이 잠시 빌려준 생명’이라고 하였고, 어느 시인은 ‘현 삶을 소풍나온 것’이라고 표현하였다.

그러니 삶을 다시 죽음으로 돌려주어야 할 필연적인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나라 말에도 사람이 죽으면, 고인에 대한 예의로 ‘돌아가셨다’고 한다.

이는 원래의 본 자리로 되돌아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과 알렉산더는 33세 똑같은 나이에 죽었다.

예수님은 인류에게 진리와 빛을 주어 영원한 기쁨을 주었던 반면, 한 인간은 이 세상을 정복하려고 죄업만 짓다가 세상을 하직했다.

알렉산더가 그리스를 정복하고 동방원정을 이루고자 치룬 수많은 전쟁 속에서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피를 흘리며 죽었겠는가?

그 가족들뿐만 아니라 피정복 국가에 얼마나 많은 아픔을 주었겠는가?

또한 중국의 진시황제는 신하들에게 불로초를 구해오라는 등 법석을 떨었지만 결국 50도 못 넘기고 이 세상을 하직했다.

그러니 초로의 평범한 인간이든 세상을 호령하는 영웅호걸도 결국 죽음 앞에서는 평등한 법이다.

요즘은 웰빙(Well-being)이 아닌 웰다잉(Well-dying)을 중시한다. 그만큼 삶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죽음도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 죽음이란 삶의 한 일부분이요,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완성하기 때문이다. 신학자 토마스 아 켐피스(1379~1471)는 ‘죽음을 피하기보다는 자신의 죄를 삼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하였다.

살아 있으면서 죽음을 음미해봄은, 죽음을 거부하고 영생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을 어떻게 의미있게 살아야 하는가?’, ‘진정한 삶이란 무엇인가?’를 되짚어 보는 일이다.

<정운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