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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적인 강릉의 2월 눈

전설적인 강릉의 2월 눈

by 운영자 2014.02.27

<권영상작가>
- 2002년 한국동시문학회 상임이사
-좋은생각 월 1회 연재 중
-저서 국어시간에 읽는 동시 등


“하여튼 눈이 어엽게 왔사! 며칠째 눈만 봐 그런지 머리가 띵한 기 어지르와.”

강릉에 한창 눈 오던 날, 고향 조카한테 전화를 했더니 머리가 어지럽다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열흘 동안 2미터 가까이 내린 눈만 보아왔을 테니 현기증세가 있으려면 또 있겠다. 흰색 병실에 갇힌 환자가 어지럼증을 호소하듯 백색 눈에 갇혀 괴로워하는 강릉사람들이 걱정 되었다.

강릉의 눈은 잔인하다. 일종의 백색테러다.

강릉엔 조카들이 살고 있다. 작은형수님도 계신다. 또 속초엔 누님도 계신다.

눈 소식이 요란할 적에 누님한테 전화를 드렸더니 집이 무너질까 걱정스럽다고 하셨다.

쳐도 쳐도 자리가 나지 않아 사람이 먼저 지치겠다며 눈 멀미를 내셨다. 1911년, 기상대가 기상관측을 한 이래 이번 내린 눈이 영동지방 최대의 폭설이라 한다.

그러나 강릉 태생이라면 이런 눈 폭설에 그다지 놀라지 않는다. 흔히 겪으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강릉 지방의 폭설은 거의 전설적이다.

“자고 일어나 문을 여니 밤새 내린 눈이 처마 끝에 닿아있더라”, “이웃집과 눈 굴을 파고 다니며 아침 인사를 주고받았다”는 말은 전설처럼 회자되는 이야기이다.

그뿐이 아니다. “열흘 낮 열흘 밤을 눈이 내리는 통에 소를 잡아먹었다”는 말도 어른들한테 듣던 이야기이다. 그만큼 강릉의 2월 눈은 푸지고도 혹독하다.

눈 내린다 하면 강릉에만 내리는 법이 없다. 강릉을 굽어보는 대관령에도 함께 내린다.

강릉사람들이 말하는 대관령이란 대관령이면서 동시에 남으로 휘달려 내려가는 태백산맥이다.

대관령에 회색 눈이 퍼부으면 머지않아 그 눈이 강릉으로 이어진다.

당나귀 응앙응앙 울음소리처럼 푸짐하게 눈 내리는 밤이면 우리들은 잠을 못 잤다. 눈 무게를 못 이겨 쩡쩡 꺾이는 소나무들의 울음소리 때문이다. 이런 날의 깜깜한 밤은 긴장하지 않을 수 없다.

자다가 일어나 미닫이문을 열면 바깥은 마치 아득한 저승이거나 형형한 눈귀신의 세상처럼 낯설었다.

그런 날 아침이면 바빠진다. 변소로 가는 길을 내고, 뒤란 길을 내고, 우물길을 내러 집 밖을 나선다.

그럴 때에 문득 만나는 소나무 숲의 참혹한 설해목들. 그 좋은 6.70년생 소나무들의 허리 분질러진 상처가 가엽다.

저러느라 설해목들은 간밤 숲이 떠나가라 길게 울었다.

“어때? 눈 좀 마이 녹언?”

눈 그쳤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고향에 전화를 했다.

“큰길 아니고는 눈이 상구 그대로지 뭐. 아주 딱 보기도 싫어요.”

체머리를 흔드는 늙은 조카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방송에선 이제 강릉 눈이 그쳤다 하지만 강릉 사람들은 다 안다.

눈이 오려면 아직도 3월까지 더 와야 한다.

와도 크게 더 올 눈이 있다. 교원 발령이 날쯤을 전후해 한 번 더 와야 하고, 아이들 입학식에 한 번 더 와야 한다.

그러나 강릉에 눈 내린다는 소식이 들리면 그리 두렵지 않다. 봄이 멀지 않았다는 신호다. 강릉은 그렇게 2월 눈과 진종일 실랑이질을 치다가 어느 날 문득, 울담에 붉은 살구꽃을 피워놓는다. 그때가 벌써 4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