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 합격, 서울대학교’의 현수막과 한국인의 미래
‘축 합격, 서울대학교’의 현수막과 한국인의 미래
by 운영자 2014.03.10
<강판권목사>
- 성지감리 교회 담임목사
- 흙과 농부와 목자가 만나면의 저자
학원가나 농촌마을에 가면 ‘축 합격, 서울대학교’의 현수막을 종종 만날 수 있다. 이같은 현수막은 서울대학교의 합격만으로도 하나의 ‘사건’이기 때문이다.
적지 않은 사람들은 서울대학교에 합격한 자체만으로도 합격자의 미래가 아주 밝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러한 현수막을 단 사람들의 기쁨을 모른 바는 아니다.
그러나 서울대학교의 합격 자체가 한 인생의 장래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서울대학교의 합격 자체를 높이 평가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홍보할 대상은 결코 아니다.
한국인들의 서울대학교에 대한 선호에는 출세지향주의가 짙게 깔려 있다. 신분사회였던 봉건사회는 학벌과 혈연이 무척 중요한 삶의 기준이었지만, 근대 이후의 사회는 기준이 달라야 한다.
그런데도 한국사회는 여전히 봉건사회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봉건사회는 자신의 능력과 관계없이 태어나면서 운명이 결정되지만, 근대이후 사회는 자신의 능력에 따라 운명을 결정할 수 있다.
서울대학교에 합격한 것은 한 개인의 능력으로 이룬 것이어서 분명 칭찬할 일이지만, 그 사실을 다른 사람에게 현수막을 통해 알릴 필요는 없다.
서울대학교의 합격은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이지 다른 사람이 굳이 알 필요는 없다. 그런데도 방방곡곡에 이런 류의 현수막이 난무하는 것은 분명 정상적인 사회가 아니다.
현재 한국 사회는 중진국과 선진국의 경계에 위치하고 있다. 선진국과 중진국의 경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선진사회에 맞는 국민의 수준이 절실히 필요하다. 현수막이 난무하는 사회는 선진국의 조건이 아니다.
특히 지극히 개인의 문제를 사회문제로 환원시키는 것은 아주 저급한 단계이다.
우리가 현수막을 통해서 알아야할 것은 개인의 합격 소식이 아니라 공통체가 반드시 알아야할 주제이다. 공동체가 반드시 알아야 할 주제는 어떻게 하면 가치 있는 삶을 유지할 수 있는가이다.
서울대학교의 합격여부는 삶의 가치와 아무 관계가 없다. 고등교육기관인 대학교는 삶의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곳이지 돈과 명예를 얻는 곳이 아니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대학교를 돈과 명예를 얻는 교육기관으로 착각하고 있다. 만약 한국사회가 이런 착각에서 빨리 벗어나지 못하면 영원히 선진국으로 올라가지 못할 것이다.
한국의 미래를 밝게 하는 현수막 하나 만들면 다음과 같다.
‘축, 홍길동 아프리카 봉사활동에 참가하다’
한 인간과 공동체의 미래는 불가분의 관계이다. 한 존재에 대한 공개적인 칭찬은 한 존재가 자신과 공동체를 위해 헌신한 경우라야 인정받을 수 있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공동체에 대한 인식이 매우 낮다.
때로는 많은 사람들이 ‘패거리’를 공동체와 혼동한다. 자신과 자신의 이익과 밀접하게 관련된 일에 대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 성향이 강하다.
선진사회는 개인과 공동체의 이익을 함께 고려할 줄 아는 국민만이 만들 수 있다. 이 과정에서 국민들의 절제력이 매우 중요하지만, 현재 한국 국민들의 절제력은 선진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다.
절제력은 결코 하루아침에 얻을 수 없지만 쉼 없는 성찰과 훈련을 통해서 얼마든지 달성할 수 있다.
- 성지감리 교회 담임목사
- 흙과 농부와 목자가 만나면의 저자
학원가나 농촌마을에 가면 ‘축 합격, 서울대학교’의 현수막을 종종 만날 수 있다. 이같은 현수막은 서울대학교의 합격만으로도 하나의 ‘사건’이기 때문이다.
적지 않은 사람들은 서울대학교에 합격한 자체만으로도 합격자의 미래가 아주 밝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러한 현수막을 단 사람들의 기쁨을 모른 바는 아니다.
그러나 서울대학교의 합격 자체가 한 인생의 장래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서울대학교의 합격 자체를 높이 평가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홍보할 대상은 결코 아니다.
한국인들의 서울대학교에 대한 선호에는 출세지향주의가 짙게 깔려 있다. 신분사회였던 봉건사회는 학벌과 혈연이 무척 중요한 삶의 기준이었지만, 근대 이후의 사회는 기준이 달라야 한다.
그런데도 한국사회는 여전히 봉건사회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봉건사회는 자신의 능력과 관계없이 태어나면서 운명이 결정되지만, 근대이후 사회는 자신의 능력에 따라 운명을 결정할 수 있다.
서울대학교에 합격한 것은 한 개인의 능력으로 이룬 것이어서 분명 칭찬할 일이지만, 그 사실을 다른 사람에게 현수막을 통해 알릴 필요는 없다.
서울대학교의 합격은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이지 다른 사람이 굳이 알 필요는 없다. 그런데도 방방곡곡에 이런 류의 현수막이 난무하는 것은 분명 정상적인 사회가 아니다.
현재 한국 사회는 중진국과 선진국의 경계에 위치하고 있다. 선진국과 중진국의 경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선진사회에 맞는 국민의 수준이 절실히 필요하다. 현수막이 난무하는 사회는 선진국의 조건이 아니다.
특히 지극히 개인의 문제를 사회문제로 환원시키는 것은 아주 저급한 단계이다.
우리가 현수막을 통해서 알아야할 것은 개인의 합격 소식이 아니라 공통체가 반드시 알아야할 주제이다. 공동체가 반드시 알아야 할 주제는 어떻게 하면 가치 있는 삶을 유지할 수 있는가이다.
서울대학교의 합격여부는 삶의 가치와 아무 관계가 없다. 고등교육기관인 대학교는 삶의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곳이지 돈과 명예를 얻는 곳이 아니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대학교를 돈과 명예를 얻는 교육기관으로 착각하고 있다. 만약 한국사회가 이런 착각에서 빨리 벗어나지 못하면 영원히 선진국으로 올라가지 못할 것이다.
한국의 미래를 밝게 하는 현수막 하나 만들면 다음과 같다.
‘축, 홍길동 아프리카 봉사활동에 참가하다’
한 인간과 공동체의 미래는 불가분의 관계이다. 한 존재에 대한 공개적인 칭찬은 한 존재가 자신과 공동체를 위해 헌신한 경우라야 인정받을 수 있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공동체에 대한 인식이 매우 낮다.
때로는 많은 사람들이 ‘패거리’를 공동체와 혼동한다. 자신과 자신의 이익과 밀접하게 관련된 일에 대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 성향이 강하다.
선진사회는 개인과 공동체의 이익을 함께 고려할 줄 아는 국민만이 만들 수 있다. 이 과정에서 국민들의 절제력이 매우 중요하지만, 현재 한국 국민들의 절제력은 선진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다.
절제력은 결코 하루아침에 얻을 수 없지만 쉼 없는 성찰과 훈련을 통해서 얼마든지 달성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