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나는 고리타분한 게 싫다

나는 고리타분한 게 싫다

by 운영자 2014.03.20

<권영상작가>
- 2002년 한국동시문학회 상임이사
-좋은생각 월 1회 연재 중
-저서 국어시간에 읽는 동시 등


‘아빠, 고리타분한 말 좀 하지 마!’ 딸애가 그런다. ‘뭐가 고리타분하다고?’ 내가 쏜다.

그러자 곧장 대답이 날아온다. ‘클래식 좀 들어라, 좀 좋은 책 읽고, 아빠 한 말 곰곰이 좀 생각해 봐라, 문자 좀 고만 보내고!’ 그러는 게 고리타분한 말이란다.

‘아빠니까 그러는 거지 그게 왜 고리타분이야!’ 하고 돌아서는데 내 등이 뜨끔하다.

젊은 저격수의 화살에 맞은 듯하다. 나는 아니라지만 20대 딸아이에게 안 통하는, 콜콜 냄새나는 낡은 요구임이 분명하다.

나이 좀 먹었다고 나는 왜 자꾸 콜콜해질까. 클래식은 또 웬 클래식이고, 좋은 노래 나쁜 노래는 또 뭔가. 좋은 책은 어디 있고, 나쁜 책은 또 어디 있다고 애에게 그런 소릴 할까.

나는 왜 내가 한 말을 금과옥조처럼 여겨주길 바라는 걸까. 오래 살아온, 늙은 눈으로 본 세상을 왜 젊은 딸애에게 강요하는 걸까. 안에서 새는 쪽박 밖에서도 샌다.

에스컬레이터에서 젊은 커플이 바짝 마주 껴안고 있는 걸 보면 ‘저런 나쁜!’ 그런 말을 할까 말까 한다. 껴안고 있는 모습이 보기에 좋은가 싫은가.

내가 왜 이러는 걸까. 나도 젊은 날 아버지가 싫어하시는 만화방을 전전했고, 아닌 나이에 술집을 헤집고 다녔고, 담배를 꼬나물고 거리를 횡행했다.

클래식이 아니라 유행가를 입에 달고 살았고, 밤이면 얼굴 벌개가지고 음란한 무협지를 읽어댔다.

공부시간에 공부는 안 하고 소설을 끄적이다 학생부에 끌려가 손들고 꿇어앉기도 했다. 소년 시절, 나는 어른들 보기에 눈살 찌푸릴 일만 즐겨 하고 다녔다.

누구의 말도 곰곰이 새겨듣지 않았다. 그렇게 살아놓고, 딸아이가 내 앞에 앉을 때면 나는 군자 연한다. ‘아빠가 어렸을 땐’을 연발한다. 어렸을 땐 할아버지를 따라 그 많은 농사일 잔소리 한 번 안 듣고 척척 했다고 한다.

그러고도 학원은 커녕 밤새도록 혼자 공부했고, 시험은 봤다하면 전교 1등이라고 말한다.

아니 이 세상 모든 ‘아빠’들이 그런다. 나는 항상 순종적이고 모범적이었다. 이게 사실이라면 나는 전기적인 인물이 틀림없다. 너무도 험난한 환경 속에서 누구도 이룰 수 없는 일을 기적적으로 일구어낸 가소로운 인물.

“아빠, 아빠 살던 시절도 힘들었지만 지금 우리는 그때보다 더 힘들어.”

딸아이가 취업 때문에 괴로워할 때 내게 그런 식으로 말했다. 나는 언제나 내가 본 논두렁과 밭두렁, 내가 본 태백준령과 고향의 갯물, 갯물과 맞닿아있는 바다를 본 것으로 딸아이에게 말한다.

그런 내가 햄버거와 피자와 스마트폰과 컴퓨터와 영화관이 가까운 곳에서 태어나고 자란 전형적인 도시아이들에게 내가 들려줄 게 뭐가 있다고 시시콜콜일까.

취업 때문에 골머리를 싸매고, 성형으로 몸매를 고치고, 어른이 되어서도 왕따가 두려운 세상을 나는 왜 외면하려 하는가. 좀 심플하고 싶다.

여행을 떠나려면 확 떠나고, 좋은 옷 보면 가격과 상관없이 확 사 입어보고 싶다. 나는 왜 소비하는 재미를 모를까. 고리타분하다는 말에 왜 궁색한 변명만 늘어놓을까?

소통, 소통 하면서 소통하려 하기보다 이미 한 물 간 논리를 들이대며 설득하려고 할까. 부정과 부조리의 질곡을 건너온 내가 뭐 정직하다고 꼭 한 마디 하려는 걸까.

인생을 다 아는 것처럼 이러네 저러네 하는 고리타분한 내가 싫다. 나는 늙는 게 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