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저만치

저만치

by 운영자 2014.03.26

<한희철목사>
- 성지감리 교회 담임목사
- 흙과 농부와 목자가 만나면의 저자

기억의 기한은 얼마나 되는 것일까요? 우리 앞을 지나간 일들은 우리 마음속에 얼마나 오래 머무는 것일까요? 많은 일들이 지나가고 찾아오는 우리들의 삶, 모든 것을 다 기억에 담기에는 한계가 있겠지요.

그렇다면 기억은 마음속에 어떻게 뿌리를 내리고, 또 어떻게 사라지는 것일까요?

생각해보면 이내 사라지는 기억이 있는가 하면 오래 가는 기억이 있습니다.

바람을 만난 연기처럼 금방 사라지는 일들도 있고, 마치 마음속에 뿌리를 내린 것처럼 오래 남아 있는 일들도 있습니다.

금방 사라지고 오래 남는 것의 기준은 결코 일의 크기나 거창함만은 아닙니다. 별 것 아니다 싶었던 사소한 일들이 용케 마음에 남았다가 언 땅 헤치고 봄꽃 피어나듯 고개를 내밀 때도 있으니까요.

기억의 창고 속에 남아 있다 불쑥 불쑥 고개를 내미는 기억 중에는 고등학생 시절 국어시험과 관련된 것도 있습니다.

손가락을 펴 셈해보니 어언 40여 년 전의 일, 그런데도 그 때의 시험 문제 하나가 기억에 남아 있으니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기억에 남아 있는 시험문제의 내용은 두보와 소월의 시를 비교하는 것이었습니다.

예문으로 주어졌던 시는 소월의 대표적인 시 ‘산유화’였습니다.

“산에는 꽃 피네/ 꽃이 피네/ 갈 봄 여름없이/ 꽃이 피네 // 산에/ 산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있네 // 산에서 우는 새여/ 꽃이 좋아/ 산에서/ 사노라네 // 산에는 꽃지네/ 꽃이 지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지네”

문제는 소월의 시 중에서 두보의 시와 소월의 시를 구분 지을 수 있는 단어 하나를 찾고, 그 이유를 쓰라는 것이었습니다.

문제 자체가 너무나 신기하게 여겨졌습니다.

단어 하나로 시인의 시 세계를 구분하라니요!

문제가 요구한 답은 ‘저만치’였습니다. ‘저만치’라는 단어가 자연과의 ‘합일’을 추구한 두보의 시 세계와 자연을 ‘관조’하는 소월의 시 세계를 구분 짓는 것이었습니다.

그 문제를 어떻게 풀었는지, 맞았는지 틀렸는지는 기억에 없습니다. 다만 단어 하나가 그토록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놀라움으로 이제껏 마음에 남아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대개가 그런 것 아닐까 싶습니다.

멀리서 지켜보았던 예쁜 웃음 하나, 골목길에서 얼핏 마주치며 맡았던 비누 향기, 당황할까 싶어 얼른 고개를 돌려야 했던 눈물, 부끄러움으로 마주잡았던 손에 남은 체온, 돌에 새겨진 듯 마음에 남아 지워지지 않는 말 한 마디, 숨이 턱 멎을 뻔했던 풍경들, 대개는 그렇게 사소해 보이는 일들이 마음에 오래 남아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마주하는 여러 가지 일들, 만나는 많은 사람들, 나누는 이런저런 이야기들, 어느 것 하나 사소한 것이 따로 없지 싶습니다.

내 마음속에, 나와 시간을 함께 한 누군가의 마음속에 어떤 단어 하나, 표정 하나가 씨앗처럼 남게 될지는 누구도 모를 일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