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화와 낙화암
낙화와 낙화암
by 운영자 2014.04.07
강판권목사
- 성지감리 교회 담임목사
- 흙과 농부와 목자가 만나면의 저자
인생은 언제나 예상보다 빠르다. 인간이 정한 시간은 일정하지만 세월은 늘 먼저 간다. 인간이 시간을 예상보다 빠르게 느끼는 것은 뭔가를 기다리기 때문이다. 봄철에는 꽃을 기다린다.
그러나 기다린 꽃은 금방 떨어진다.
봄을 기다린다는 뉴스를 접한지 어제 같은데, 벌써 남쪽에는 목련은 말할 것도 없고 벚꽃마저 비바람에 떨어져 땅에 뒹군다. 낙화는 꽃을 기다린 사람들을 슬프게 하지만, 부여의 낙화암은 훨씬 가슴 아프게 한다.
떨어진 꽃은 내년에 다시 볼 수 있지만 낙화암에서 떨어진 꽃다운 생명은 다시 돌아오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전국에는 꽃을 볼 수 있는 명소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나는 봄철 그 어느 곳보다 낙화암이 그립다. 내가 사는 곳에서 멀리 떨어져 해마다 찾아갈 수는 없지만, 마음으로 늘 그리워하는 곳이 부여의 낙화암이다.
이른바 삼천궁녀들이 나라의 멸망과 함께 떨어져 죽었다는 낙화암은 세계에서도 가장 슬픈 역사적 장소이다.
누군가를 위해 꽃다운 인생을 바치는 것만큼, 누군가를 위해 가장 고귀한 생명을 바치는 것만큼 숭고한 것도 없다.
때로는 그것이 아주 무모하고,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일지라도, 그 당시에는 가장 절박한 상황이었으리라.
세상에서 가장 힘든 것은 절박한 순간이다.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도 절박한 순간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언제나 찰나에 일어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봄나들이를 즐기는 것도 찰나의 꽃을 만끽하기 위해서이다. 세상에는 찰나를 살다간 사람들도 적지 않다. 낙화암에 올라서면 백마강에 떨어진 찰나를 살다간 꽃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간혹 백마강에서 삼천궁녀가 죽었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정말 부질없는 질문이다. 백마강에서 삼천궁녀가 죽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이 과연 삼천궁녀를 거느리고 있었는가를 묻는 사람도 있지만 이 역시 부질없는 질문이다. 의자왕의 궁녀가 몇 명인지를 아는 사람도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찰나의 삶이다. 그러나 찰나의 삶은 결코 끝이 아니다. 모든 생명체는 한 평생 찰나를 살아가기 때문이다. 찰나의 과정이 삶이다.
찰나를 절박하게 살아가지 않는 사람은 아름다운 삶을 만들 수 없다.
봄꽃이 아름다운 것은 찰나에 피기 때문이 아니라 찰나의 삶을 살아가는 생명체이기 때문이다.
인생은 봄철에 피는 꽃처럼 한 바탕 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한 바탕 쇼를 허무로 환원시키는 사람만큼 어리석은 자도 없다.
꽃이 짧은 기간 동안만 핀다고 해서 아름다운 것을 곧 허무하다고 생각한다면 고귀한 삶을 모독하는 것이다.
삶에는 허무(虛無)란 없다. 가치 없다는 의미의 허무는 삶에 대한 모독이다.
짧은 기간 동안 피었다가 지는 꽃은 허무가 아니라 무상(無常)이다. 무상은 허무가 아니라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뜻이다.
아름다운 꽃은 변하기 때문에 만날 수 있다. 낙화도 변하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다. 아름다움은 변해야 맛볼 수 있다. 그러니 변하는 것은 모두 아름답다.
그러나 자신이 변하지 않으면 낙화의 아름다움을 즐길 수 없다. 내가 봄철 꽃다운 궁녀들의 영혼이 서린 낙화암을 그리워하는 이유이다.
- 성지감리 교회 담임목사
- 흙과 농부와 목자가 만나면의 저자
인생은 언제나 예상보다 빠르다. 인간이 정한 시간은 일정하지만 세월은 늘 먼저 간다. 인간이 시간을 예상보다 빠르게 느끼는 것은 뭔가를 기다리기 때문이다. 봄철에는 꽃을 기다린다.
그러나 기다린 꽃은 금방 떨어진다.
봄을 기다린다는 뉴스를 접한지 어제 같은데, 벌써 남쪽에는 목련은 말할 것도 없고 벚꽃마저 비바람에 떨어져 땅에 뒹군다. 낙화는 꽃을 기다린 사람들을 슬프게 하지만, 부여의 낙화암은 훨씬 가슴 아프게 한다.
떨어진 꽃은 내년에 다시 볼 수 있지만 낙화암에서 떨어진 꽃다운 생명은 다시 돌아오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전국에는 꽃을 볼 수 있는 명소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나는 봄철 그 어느 곳보다 낙화암이 그립다. 내가 사는 곳에서 멀리 떨어져 해마다 찾아갈 수는 없지만, 마음으로 늘 그리워하는 곳이 부여의 낙화암이다.
이른바 삼천궁녀들이 나라의 멸망과 함께 떨어져 죽었다는 낙화암은 세계에서도 가장 슬픈 역사적 장소이다.
누군가를 위해 꽃다운 인생을 바치는 것만큼, 누군가를 위해 가장 고귀한 생명을 바치는 것만큼 숭고한 것도 없다.
때로는 그것이 아주 무모하고,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일지라도, 그 당시에는 가장 절박한 상황이었으리라.
세상에서 가장 힘든 것은 절박한 순간이다.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도 절박한 순간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언제나 찰나에 일어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봄나들이를 즐기는 것도 찰나의 꽃을 만끽하기 위해서이다. 세상에는 찰나를 살다간 사람들도 적지 않다. 낙화암에 올라서면 백마강에 떨어진 찰나를 살다간 꽃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간혹 백마강에서 삼천궁녀가 죽었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정말 부질없는 질문이다. 백마강에서 삼천궁녀가 죽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이 과연 삼천궁녀를 거느리고 있었는가를 묻는 사람도 있지만 이 역시 부질없는 질문이다. 의자왕의 궁녀가 몇 명인지를 아는 사람도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찰나의 삶이다. 그러나 찰나의 삶은 결코 끝이 아니다. 모든 생명체는 한 평생 찰나를 살아가기 때문이다. 찰나의 과정이 삶이다.
찰나를 절박하게 살아가지 않는 사람은 아름다운 삶을 만들 수 없다.
봄꽃이 아름다운 것은 찰나에 피기 때문이 아니라 찰나의 삶을 살아가는 생명체이기 때문이다.
인생은 봄철에 피는 꽃처럼 한 바탕 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한 바탕 쇼를 허무로 환원시키는 사람만큼 어리석은 자도 없다.
꽃이 짧은 기간 동안만 핀다고 해서 아름다운 것을 곧 허무하다고 생각한다면 고귀한 삶을 모독하는 것이다.
삶에는 허무(虛無)란 없다. 가치 없다는 의미의 허무는 삶에 대한 모독이다.
짧은 기간 동안 피었다가 지는 꽃은 허무가 아니라 무상(無常)이다. 무상은 허무가 아니라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뜻이다.
아름다운 꽃은 변하기 때문에 만날 수 있다. 낙화도 변하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다. 아름다움은 변해야 맛볼 수 있다. 그러니 변하는 것은 모두 아름답다.
그러나 자신이 변하지 않으면 낙화의 아름다움을 즐길 수 없다. 내가 봄철 꽃다운 궁녀들의 영혼이 서린 낙화암을 그리워하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