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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마음이 현재에 있습니까?

지금 마음이 현재에 있습니까?

by 운영자 2014.04.08

불교 신자를 떠나 기독교 목사님, 철학자들도 좋아하는 경전이 있는데, 바로 <금강경>이다. 이 경전에서는 사람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을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용 중에 이런 내용이 있다. “지나간 마음도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다(過去心不可得 現在心不可得 未來心不可得).” 이 내용과 관련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중국 당나라 때, 덕산(782~865)선사는 오로지 <금강경>만 연구하는 불교 학자였다.

스님은 북쪽 지역에 살고 있었는데, 남쪽 지역 스님들은 문자(경전)를 부정하고(不立文字) 오로지 마음만 닦으면 된다(見性成佛)는 주장을 하였다.

덕산 스님은 자신과 생각이 다른 남방 스님들과 한판 논쟁을 벌이기 위해 길을 떠났다.

스님이 풍주 지방에 이르렀을 때, 점심시간이 되어 배가 고프던 차에 떡장수할머니를 만났다. 할머니는 스님께 물었다.

“스님. 등에 무슨 짐을 그렇게 많이 지고 있습니까?”

“<금강경>과 관련된 논문과 자료들입니다. 여기 남방 지역 스님들과 토론하려고 이렇게 많은 책을 짊어지고 가는 길입니다.”

그러자 할머니가 스님께 말했다.

“스님, 스님께서는 <금강경> 학자라고 했는데, 제가 질문을 하나 해서 스님께서 답을 맞히면, 떡을 공짜로 드리겠습니다.”

스님은 흔쾌히 물으라고 하였다. 할머니가 물었다.

“스님, <금강경>에 ‘지나간 마음도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다.’라고 했는데, 스님께서는 지금 마음을 어디에다 점을 찍겠습니까(點心)?”

여기서 ‘마음에 점을 찍다’는 말은 한자로 점심(點心)을 말한다. 우리가 정오에 식사하는 점심, 그 단어이다.

중국에서 점심은 정오에 먹는 식사가 아니라 배가 고플 때, 잠시 배고픈 마음을 달랜다는 의미로 먹는 간식을 점심이라고 한다.

중국과 한국에서 점심이라는 단어를 달리 쓰고 있는 것이다.

스님은 할머니의 질문에 너무 놀랐다. 스님은 오랜 동안 불교학문을 했지만, 마음이 어느 시점이라고 답을 하려니, 꽉 막혔던 것이다.

결국 스님은 할머니께 떡을 얻어먹지 못하였다.

인류 역사상 과거 현재 미래라고 정해놓은 것도 그냥 추상적인 단어이지, 과연 언제가 현재이고, 언제가 미래인가? 또한 미래는 언제인가?

그 현재와 과거와 미래라고 인식하는 그 마음도 시시각각으로 변하고 있다. 또한 인간의 생각은 시간과 공간의 상황에 따라 순간순간 변하게 되어 있다.

이렇게 끊임없이 변하고 있는데, 어느 마음을 잡아서 현재라고 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내 마음’이라고 하지만 그 마음이라는 것도 완전한 자신은 되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 마음을 찾기 위해 명상을 하거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바로 이 마음을 찾으려고 하기 때문에 인간은 꽃보다 아름다운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