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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8㎡공간 사람이 살고 있었네

2.18㎡공간 사람이 살고 있었네

by 운영자 2014.04.11

<이규섭시인>
- 월간<지방의 국제화>편집장
- 한국신문방송인클럽 상임이사
- 저서 별난 사람들, 판소리 답사기행 등

2.18㎡(0.65평)의 공간, 양팔을 벌리면 벽에 닿아 펼칠 수 없을 만큼 좁다. 그곳에도 사람은 살고 있었다.

내가 만약 그 곳에 머물 운명이라면 얼마나 견딜 수 있을까.

부대끼며 살아 온 날들을 차분하게 반추할 여백의 시간을 누릴 수 있을까.

사람으로 인해 받았던 상처를 치유하며 절대 고독의 심오한 경지에 들 수 있을 것인가. 가식의 허물을 벗고 참 나를 찾아 참회록을 육필로 쓰는 기회로 삼을 수도 있다. 하지만 자신이 없다.

역마살이 끼어 자유분방하게 떠돌던 영혼이 좁은 공간에 갇혀 얼마나 버틸지 생각만 해도 숨통이 막힌다.

지난 3일 영등포교도소 철거를 앞두고 일반인들에게 개방한 독방은 좁고 음습했다. 앞쪽은 철창, 뒤쪽은 변기, 작은 창문이 바깥세상을 바라보는 유일한 소통의 창이다.

홑이불과 베개, 검정 고무신이 생활 소품의 전부다. 생존에 필요한 수면과 배설만이 가능할 뿐 단절의 공간이다.

독방은 흔히 징벌(懲罰)방이라 부른다. 교도소의 규칙을 위반하거나 폭력을 휘두르면 독방에 수용되고 시국사범도 수감된다.

최근 지방교도소에 수감된 성소수자가 긴 머리 삭발을 거부해 독방에 감치되어 인권논란이 불거졌다.

감옥 속의 감옥인 독방에 갇히면 방바닥에서 식사를 하고 운동시간 30분도 빼앗긴다. 편지와 면회, 집필도 제한 당한다니 삶은 없고 생존만 있다. 독방 벽에는 ‘반성. 노력하면 산다. 이곳에 있는 동안 미래를 설계하라.

자신과의 싸움에서 지면 인생에서도 진다’라고 글이 보인다. 좁은 공간에서 자신과의 싸움을 벌인 처연한 흔적이다.

6∼7명 수용실도 좁기는 마찬가지다. 철창 입구에는 이방에 갇혔던 재소자들의 죄수번호와 죄명이 적힌 조그마한 쪽지가 그대로 꽂혀 있다. 살인, 특수강도, 강간 등 상해, 살인미수, 강도 상해 등 섬뜩한 범죄자들이다.

수용실 벽에는 ‘수용자가 지켜야 할 원칙’이라는 알림문이 붙어 있다. 아침 식사로 김칫국과 멸치볶음 등이 나온다는 2011년 10월 마지막 식단표가 남아 있다.

차가운 철창 입구에 ‘따뜻한 말 받고 보니 따뜻한 정 주고 싶네’라는 교정 표어가 그대로 걸려있어 살벌한 주위 풍경과 대비된다.

영등포교도소는 1949년 부천형무소라는 이름으로 문을 열었다. 행정구역 변경에 따라 1961년 부천교도소, 1968년 영등포교도소로 명칭이 바뀌었다.

2011년 5월 서울남부교도소로 바뀐 뒤 같은 해 10월 구로구 외곽 지역인 천왕동 새 교정시설로 이전했다.

긴급조치 1호 위반 사건의 첫 피고인이었던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을 비롯해 김지하 시인, 김근태 전 민주당 고문도 이곳을 거쳐 갔다.

‘유전무죄 무전유죄’ 발언으로 법치의 차별화를 신랄하게 풍자했던 지강헌은 이곳에서 공주교도소로 이감되던 중 탈주해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기도 했다. 아직도 그의 말은 현재진행형이다.

재벌 회장의 교도소 하루 노역이 5억원으로 향판(鄕判) 논란이 불거졌다. 1만5600원을 훔쳐 3년형을 선고 받은 노숙자의 하루치 죗값은 14원이다. 빈부에 따른 차별 대우는 교도소에서 조차 하늘과 땅 차이다.

죄는 미워해도 인간과 인권을 무시해서는 진정한 교도(矯導)가 이루어지기 어렵다. 인생의 빨간 딱지가 붙지 않으려면 죄는 짓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