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만치 북한 땅을 바라보며
저만치 북한 땅을 바라보며
by 운영자 2014.06.11
지난 며칠간 제가 속한 한 모임에서 중국을 다녀왔습니다. 백두산 천지와 윤동주 생가 등을 둘러보는 일정이었습니다.언젠가는 찾아가야지, 북한 땅을 통해서 찾아갈 수 있다면 더욱 좋을 텐데, 백두산 천지는 그렇게 마음에 두었던 장소 중 하나였습니다.
처음 듣는 말은 아닙니다만,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니 천지는 아무나 아무 때나 와서 보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백두산의 의미를 ‘백두 번을 와야 한 번 볼 수 있는 곳’이라 풀이를 했으니까요. 백두산에 오르기 전날 숙소인 이도백하에 도착했을 때 하늘은 흐리고 간간이 비가 흩뿌려 가이드의 말은 더욱 실감나게 다가왔습니다.
걱정을 하며 다음날 아침을 맞았을 때 날은 환히 개어 있었습니다. 바람은 선선하게 불고 하늘은 맑아 더없이 좋은 날씨였습니다.
부지런을 떤다고 떨었지만 백두산으로 들어가는 출입구 앞에는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장백산으로 불리는 백두산은 중국에서도 10대 명산 중의 하나로 인정받고 있었습니다.
인파 속을 뛰어 겨우 버스를 탄 뒤 다시 승합차로 바꿔 타니 마치 롤러코스터를 탄 듯 굽이굽이 굽어진 길을 막힘없이 내달려 산을 오릅니다.
그러는 동안 어느새 창밖으로 보이는 만년설, 가슴이 설레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언덕 위에 올라섰을 때 수많은 관광객들 사이로 천지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여름에 가까운 날씨였지만, 아직도 천지의 물은 얼어 있었습니다.
천지를 바라보는 사람과 사진을 찍는 사람들, 태고의 신비를 느끼고 싶었던 것과는 달리 천지 정상은 소란스럽기 그지없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뭔가 묵중한 감정이 가슴을 내리누르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 모두의 태(胎), 민족의 자궁(子宮) 앞에 선 느낌이었습니다.
우리가 오른 곳은 북파(北坡) ‘천문봉’이었습니다. 행렬을 따라 움직이다 보니 4호 경계비가 우리 앞을 가로막았는데, 경계비 건너편이 북한 땅이라 했습니다. 어느 누구 한 사람도 보이지 않는 황량한 땅, 그 땅을 먼 길을 돌아와 남의 땅처럼 바라봐야 하는 마음이 착잡했습니다.
그런 심정으로 보니 문득 천지의 물이 민족의 눈물이 고인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송이로 유명한 중국 삼합의 전망대 위에서 북한의 회령시를 바라볼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 땅이 코앞에 펼쳐져 있는데, 그 땅을 남의 땅처럼 구경하듯 바라보며 눈물만 닦고 있는 우리의 처지가 한스러웠습니다.
그런 감정은 두만강에서 배를 탈 때 정점에 이르렀습니다.
비록 흙탕물이라 하여도 유유히 흘러가는 두만강의 폭은 넓지가 않았습니다. 이것이 국경이 맞나 싶을 만큼 폭이 좁았습니다.
버드나무가 서 있을 뿐 아무런 경계도 없는 그 강을 우리는 배를 타고 오르내렸습니다.
누군가 부르는 ‘눈물 젖은 두만강’ 노래는 더없이 애절했지만, 강 저 편이 북한 땅이라는 것은 내내 실감이 되지 않았습니다.
눈앞에 놓인 이 작은 거리를 어떻게 하면 좁혀 발을 내딛을 수 있을 것인지, 생각은 아뜩해지기만 했습니다.
처음 듣는 말은 아닙니다만,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니 천지는 아무나 아무 때나 와서 보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백두산의 의미를 ‘백두 번을 와야 한 번 볼 수 있는 곳’이라 풀이를 했으니까요. 백두산에 오르기 전날 숙소인 이도백하에 도착했을 때 하늘은 흐리고 간간이 비가 흩뿌려 가이드의 말은 더욱 실감나게 다가왔습니다.
걱정을 하며 다음날 아침을 맞았을 때 날은 환히 개어 있었습니다. 바람은 선선하게 불고 하늘은 맑아 더없이 좋은 날씨였습니다.
부지런을 떤다고 떨었지만 백두산으로 들어가는 출입구 앞에는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장백산으로 불리는 백두산은 중국에서도 10대 명산 중의 하나로 인정받고 있었습니다.
인파 속을 뛰어 겨우 버스를 탄 뒤 다시 승합차로 바꿔 타니 마치 롤러코스터를 탄 듯 굽이굽이 굽어진 길을 막힘없이 내달려 산을 오릅니다.
그러는 동안 어느새 창밖으로 보이는 만년설, 가슴이 설레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언덕 위에 올라섰을 때 수많은 관광객들 사이로 천지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여름에 가까운 날씨였지만, 아직도 천지의 물은 얼어 있었습니다.
천지를 바라보는 사람과 사진을 찍는 사람들, 태고의 신비를 느끼고 싶었던 것과는 달리 천지 정상은 소란스럽기 그지없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뭔가 묵중한 감정이 가슴을 내리누르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 모두의 태(胎), 민족의 자궁(子宮) 앞에 선 느낌이었습니다.
우리가 오른 곳은 북파(北坡) ‘천문봉’이었습니다. 행렬을 따라 움직이다 보니 4호 경계비가 우리 앞을 가로막았는데, 경계비 건너편이 북한 땅이라 했습니다. 어느 누구 한 사람도 보이지 않는 황량한 땅, 그 땅을 먼 길을 돌아와 남의 땅처럼 바라봐야 하는 마음이 착잡했습니다.
그런 심정으로 보니 문득 천지의 물이 민족의 눈물이 고인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송이로 유명한 중국 삼합의 전망대 위에서 북한의 회령시를 바라볼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 땅이 코앞에 펼쳐져 있는데, 그 땅을 남의 땅처럼 구경하듯 바라보며 눈물만 닦고 있는 우리의 처지가 한스러웠습니다.
그런 감정은 두만강에서 배를 탈 때 정점에 이르렀습니다.
비록 흙탕물이라 하여도 유유히 흘러가는 두만강의 폭은 넓지가 않았습니다. 이것이 국경이 맞나 싶을 만큼 폭이 좁았습니다.
버드나무가 서 있을 뿐 아무런 경계도 없는 그 강을 우리는 배를 타고 오르내렸습니다.
누군가 부르는 ‘눈물 젖은 두만강’ 노래는 더없이 애절했지만, 강 저 편이 북한 땅이라는 것은 내내 실감이 되지 않았습니다.
눈앞에 놓인 이 작은 거리를 어떻게 하면 좁혀 발을 내딛을 수 있을 것인지, 생각은 아뜩해지기만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