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그리움의 시간

그리움의 시간

by 운영자 2014.07.10

창밖 등나무 벤치를 내려다 본다. 등나무 덩굴이 점점 두터워지면서 파랗다. 나는 7월의 초록빛에 이끌려 일어섰다.초록은 어느 길로 하여 이곳으로 오는지. 빛이 오는 길을 찾으러 책더미 속에서 시집 한 권을 찾아들고 집을 나섰다.

“배꽃이거나 석류꽃이 내려오는 길이 따로 있어/ 오디가 익듯 마을에 천천히 여럿 빛깔 내려오는 길이 있어서/ 가난한 집의 밥 짓는 연기가 벌판까지 나가보기도 하는 그런 길이 분명코 있어서/ 그 길이 이 세상 어디에 어떻게 나 있나 쓸쓸함이 생기기도 하여서......”

문태준 시인의 시 ‘길’을 읽으며 계단을 다 내려왔다. 나와 연결된 이 길은 세상으로 나가는 어떤 길과 이어져 있는지, 괜히 할 일 없는 사람처럼, 아니 초등학교 1학년 아이처럼 곧이곧대로 아파트 정문을 나가 먼데로 이어진 길을 바라보다가 돌아선다.

마당을 돌아 아파트 등나무 벤치에 와 털썩 주저앉았다. 그때다. 저쯤 철쭉 숲에 누군가 만들어 세운 팻말이 보인다.

메타세콰이어를 베어내고 새로 철쭉을 심은 자리다. 얼핏 보기에 어설프게 만든 팻말이다.

알미늄 폴대 끝에 플라스틱을 네모로 잘라붙였다. 나는 호기심에 다가갔다.

“제발 이 까마중을 뽑지 말아주세요. 풀이 아닙니다.”

볼펜으로 쓴 종이가 덧붙어 있다. 그걸 눈여겨보고 있을 때 관리소 직원이 다가왔다.

“703호 할머니가 세우신 겁니다. 사람들이 모르고 뽑을까봐 걱정 걱정하셨어요.” 그러신다.

어느 동 703호인지, 어떤 할머니가 거기에 사시는지 알 거까지야 없지만 그분이 저 풀을 까마중으로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시골에서 살아본 사람이라면 까마중을 모를 리 없다.

달콤하거나 아니면 아리거나한 까마중. 까마중을 따먹느라 풀숲을 헤치다가 집에 돌아와 거울 앞에 서면 입술은 잉크빛처럼 까맸다.

703호에 사시는 분에게도 그런 경험이 있었겠다. 그러기에 그분에게 있어 까마중은 풀이지만 풀이 아니다. 그것은 고향 그 자체이다. 까마중을 따먹던 어린 시절의 고향이다. 그 풀 한 포기가 얼마나 반가웠으면 그분은 저렇게 팻말을 만들어 세웠을까.

그분에게 있어 고향이 오는 길은 까마중 속에 있다. 파란 까마중이 까맣게 익을 무렵 고향은 여럿의 빛깔로 그 분에게로 올 테다.

그것은 쓸쓸함일 수도 있고, 외로움을 감싸주는 그리움의 빛깔일 수도 있다. 지금은 인생의 일몰을 바라보는 몸일 테지만 까마중 속의 그분은 어린 갈래머리 소녀일 수도 있겠다.

사람에겐 누구나 생각이 오고 가는 매개물이 있다. 그 매개물을 보는 순간, 시공간을 초월하는 아스라한 길이 놓인다. 나는 관리소 직원과 헤어져 등나무 그늘 아래에 놓인 벤치를 바라본다.

저 7월의 등나무 벤치를 따라가면 내 생각은 고향 읍내에 있는 병원 마당에 가 닿는다.

나는 그 병원 등나무 벤치에 앉아 퇴원할 줄 모르는 어머니를 2년 동안이나 내 몸이 해쓱해지도록 기다렸다. 가끔 내가 여기 이 벤치에 나와 앉는 것도 40여 년전, 그 그리움의 시간에 가 닿고 싶기 때문인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