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신호(2)
빨간 신호(2)
by 운영자 2014.08.18
지식이 방향성을 잡지 못하면 우리의 삶을 해칠 수도 있다. 지식이 지성으로 지혜로 숙성되어야 한다.다른 사람의 마음을 내 마음처럼, 다른 사람의 처지를 내가 겪고 있는 상태로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이 곧 인성이다.
인성과 창의성은 뗄 수도 없고 떼어서도 안 된다. 후진적 대형 인재가 반복되지 않으려면 우리 국민의 전반적인 시민 의식을 높여야 한다.
여기에는 어른들의 올바른 모범, 올바른 기대, 무징계(無懲戒), 무소유 의식(無所有 意識)이 필요하다. 노자도 ‘생지축지 생이불유(生之畜之 生而不有)’라 하지 않았던가?
스스로 알을 깨고 나오면 한 마리 생명력 있는 병아리가 되고 남이 깨주면 1회용 달걀 프라이로 끝이 난다는 말도 그 때뿐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自己)만의 아집과 편견과 고정관념의 껍질에 둘러싸여 있는 경우도 많다.
스스로 구속하는 비좁은 마음속에서 답답함을 못 이겨 몸부림치며 괴로워하는 것이 우리들의 자화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자기 혁신은 바로 이 껍질을 깨고 나오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우리 조직 속에는 또 얼마나 많은 벽이 있는가? 의식의 벽, 제도의 벽, 관행의 벽, 조직의 벽 등등. 그 두꺼운 껍질은 누구도 다른 사람이 깨주기 어렵다. 스스로 깨고 나와야 한다.
스스로 알을 깨고 나오는 부화과정이 바로 ‘자성반성(自性反省)’이다.
아름다운 카리브 해, 밤바다로 유명한 파나마의 모스키토만, 바람이 불고 물결이 출렁이면 밤바다가 빛으로 춤을 춘다. 거기에는 비밀의 빛이 숨어있다.
그 아름다운 빛의 비밀은 ‘녹틸루카 신틸라스’라는 단세포 야광충 수 억 마리가 모여 밤바다의 장관을 연출하는 것이다.
원래 새우는 천적으로부터 보호받기 위해 투명한 몸을 갖고 있는데, 녹틸루카를 먹어버림으로 해서 ‘나 여기 있소.’라고 광고를 하게 셈이 되는 것이다. 그 야광 빛은 녹틸루카 신틸라스의 생존을 위한 고육책인 것이다.
자기를 잡아먹은 새우가 자신이 내는 빛으로 위장이 반짝거려 결국 오징어에게 발각되어 먹혀버리도록 해서, 자신의 동료를 보호하는 우정을 실천하는 것이다. 새우는 먹지 말아야 할 것을 먹은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되는 것이다.
새우는 ‘이 정도면 괜찮겠지.’ 하며 작게 생각했던 일로 인해 오징어의 먹이가 되어 버린 것이다.
‘괜찮겠지.’ 라고 생각했던 작은 일들로 인해 발목이 잡히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
리더 자리가 힘든 이유는 작은 것도 세상의 시선으로 보고, 절제하는 능력이 요구되기 때문이고,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잘 구분해야 하기 때문이다. 깜박하는 순간 빛나는 ‘나 여기 있소.’라고 하는 새우가 될 수 있다.
따라서 리더는 만나지 말아야 할 사람, 만나야 할 사람, 나서지 말아야 할 일, 나서야 할 일을 구분해야 한다.
샐러리맨의 임원승진 때 당락을 결정하는 것은 ‘작은 것, 사소한 일’, 즉 출·퇴근 모습, 인사 태도, 얼굴 모습, 협의회 발언 자세 등이라고 한다.
별것 아닌 것이 큰 일이 되는 것을 자주 보고 듣는다. 별 생각 없이 하는 일이 인생이 되고, ‘괜찮겠지’ 하는 일이 자신의 정체성을 만든다. 직장에서 성공하려면 집에서 자기 일을 하는 것처럼 하면 성공한다고 한다.
‘아! 그렇구나!’하는 소리는 현장의 울림이고 통찰의 외침이며 성찰의 삶이 되는 시간이다.
내일을 위해 현재를 등한시 하는 것은 후회와 불안을 증폭시키는 것이고 미래를 포기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자신의 자리가 오늘 명령하는 외침과 메아리를 듣는 마음과 자세를 길러야 한다.
이제 우리는 보이는 것만 보지 말고 보아야 할 것을 봐야 한다. 카메라에 잡히는 것을 보기보다 실제의 형상을 보아야 한다. 당연한 것을 낯설게! 익숙한 것을 새롭게! 나를 부르는 본연의 소리! 그 소리의 의미를 생각해야 한다.
그것은 현재에 집중하는 것이다. 현재를 아낌없이 쓰는 것은 때 늦은 후회를 하지 않는 ‘잠깐 멈춤’이며, 자신에 대해 최선을 다하는 삶의 자세인 것이다.
아름다운 삶은 목격자의 삶에서 실천자의 삶으로 옮겨 가는 것이며, 인생의 기본은 빨간 신호의 의미를 내 삶에 적용하고 이웃과 함께하는 것이다.
인성과 창의성은 뗄 수도 없고 떼어서도 안 된다. 후진적 대형 인재가 반복되지 않으려면 우리 국민의 전반적인 시민 의식을 높여야 한다.
여기에는 어른들의 올바른 모범, 올바른 기대, 무징계(無懲戒), 무소유 의식(無所有 意識)이 필요하다. 노자도 ‘생지축지 생이불유(生之畜之 生而不有)’라 하지 않았던가?
스스로 알을 깨고 나오면 한 마리 생명력 있는 병아리가 되고 남이 깨주면 1회용 달걀 프라이로 끝이 난다는 말도 그 때뿐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自己)만의 아집과 편견과 고정관념의 껍질에 둘러싸여 있는 경우도 많다.
스스로 구속하는 비좁은 마음속에서 답답함을 못 이겨 몸부림치며 괴로워하는 것이 우리들의 자화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자기 혁신은 바로 이 껍질을 깨고 나오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우리 조직 속에는 또 얼마나 많은 벽이 있는가? 의식의 벽, 제도의 벽, 관행의 벽, 조직의 벽 등등. 그 두꺼운 껍질은 누구도 다른 사람이 깨주기 어렵다. 스스로 깨고 나와야 한다.
스스로 알을 깨고 나오는 부화과정이 바로 ‘자성반성(自性反省)’이다.
아름다운 카리브 해, 밤바다로 유명한 파나마의 모스키토만, 바람이 불고 물결이 출렁이면 밤바다가 빛으로 춤을 춘다. 거기에는 비밀의 빛이 숨어있다.
그 아름다운 빛의 비밀은 ‘녹틸루카 신틸라스’라는 단세포 야광충 수 억 마리가 모여 밤바다의 장관을 연출하는 것이다.
원래 새우는 천적으로부터 보호받기 위해 투명한 몸을 갖고 있는데, 녹틸루카를 먹어버림으로 해서 ‘나 여기 있소.’라고 광고를 하게 셈이 되는 것이다. 그 야광 빛은 녹틸루카 신틸라스의 생존을 위한 고육책인 것이다.
자기를 잡아먹은 새우가 자신이 내는 빛으로 위장이 반짝거려 결국 오징어에게 발각되어 먹혀버리도록 해서, 자신의 동료를 보호하는 우정을 실천하는 것이다. 새우는 먹지 말아야 할 것을 먹은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되는 것이다.
새우는 ‘이 정도면 괜찮겠지.’ 하며 작게 생각했던 일로 인해 오징어의 먹이가 되어 버린 것이다.
‘괜찮겠지.’ 라고 생각했던 작은 일들로 인해 발목이 잡히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
리더 자리가 힘든 이유는 작은 것도 세상의 시선으로 보고, 절제하는 능력이 요구되기 때문이고,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잘 구분해야 하기 때문이다. 깜박하는 순간 빛나는 ‘나 여기 있소.’라고 하는 새우가 될 수 있다.
따라서 리더는 만나지 말아야 할 사람, 만나야 할 사람, 나서지 말아야 할 일, 나서야 할 일을 구분해야 한다.
샐러리맨의 임원승진 때 당락을 결정하는 것은 ‘작은 것, 사소한 일’, 즉 출·퇴근 모습, 인사 태도, 얼굴 모습, 협의회 발언 자세 등이라고 한다.
별것 아닌 것이 큰 일이 되는 것을 자주 보고 듣는다. 별 생각 없이 하는 일이 인생이 되고, ‘괜찮겠지’ 하는 일이 자신의 정체성을 만든다. 직장에서 성공하려면 집에서 자기 일을 하는 것처럼 하면 성공한다고 한다.
‘아! 그렇구나!’하는 소리는 현장의 울림이고 통찰의 외침이며 성찰의 삶이 되는 시간이다.
내일을 위해 현재를 등한시 하는 것은 후회와 불안을 증폭시키는 것이고 미래를 포기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자신의 자리가 오늘 명령하는 외침과 메아리를 듣는 마음과 자세를 길러야 한다.
이제 우리는 보이는 것만 보지 말고 보아야 할 것을 봐야 한다. 카메라에 잡히는 것을 보기보다 실제의 형상을 보아야 한다. 당연한 것을 낯설게! 익숙한 것을 새롭게! 나를 부르는 본연의 소리! 그 소리의 의미를 생각해야 한다.
그것은 현재에 집중하는 것이다. 현재를 아낌없이 쓰는 것은 때 늦은 후회를 하지 않는 ‘잠깐 멈춤’이며, 자신에 대해 최선을 다하는 삶의 자세인 것이다.
아름다운 삶은 목격자의 삶에서 실천자의 삶으로 옮겨 가는 것이며, 인생의 기본은 빨간 신호의 의미를 내 삶에 적용하고 이웃과 함께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