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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무 김치 김장하던 날

순무 김치 김장하던 날

by 운영자 2014.12.11

토요일, 아내가 내려왔다. 11월이 다 가도록 텃밭에 둔 순무 때문이다.이때를 위해 지난 목요일 혼자 안성에 내려와 순무를 뽑고 마늘 심을 밭을 만들어 놓았다. 그간 아내나 나나 손이 나지 않았다.

올해는 배추 심을 자리에 순무 여섯 이랑을 심었다. 지난해 잘 지어놓은 마흔 포기 배추를 모두 배추벌레에게 바친 것이 후회 되어 그 자리에 순무를 심었다. 순무를 심게 된 건 정말이지 우연이었다.

우연히 종묘상에 들렀다가 발견한 게 순무 씨앗이었다. 그렇게 우연하게 심은 순무가 대박이었다.

커도 커도 너무 잘 커 주었다. 잘 크기만 한 게 아니다. 사람들에게 나누어줄 때마다 듣는 찬사도 대박이었다. 순무 맛을 보기도 전에 순무라는 말에 반색하는 사람들을 보며 이거 잘 심었구나, 했다.

사람들마다 순무에 대한 어떤 그리움이 있는 듯 했다. 순무는 분명 무 이상의 어떤 향수 같은 것을 불러일으키는 모양이었다.

모르는 사람에게 두어 개 뽑아주어도 그렇고, 아는 이에게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한 상자 가득 실어다 주어도 비싼 과일보다 더 반가워했다.

순무김치 김장은 처음이라 살림에 익숙한 조카내외를 불렀는데 약속한 시간에 맞추어왔다.

우리는 김장할 일을 분담했다. 남자들은 마당 수돗가에서 순무를 씻고, 마늘을 찧고, 생강을 벗기기로 하고, 안에 사람들은 방에서 순무를 썰고, 버무리고, 담는 일을 하기로 했다.

늘 썰렁하던 거실에 모처럼 보일러 불을 넘치도록 켰다. 그것도 모자라 전열기까지 켰다. 음식을 조리하느라 가스 불까지 켜고 보니 집안이 후끈후끈했다.

혼자 살면 조용한 맛을 누릴 수 있으나 사람 사는 것 같은 활기가 없어 집이 춥고 고적하다. 그러나 네 사람이 모여, 사는 이야기를 하며 일을 하다보니 집에 활기가 부쩍 돌았다.

드디어 김치 만드는 일이 끝났다. 아내는 충분하게 삶은 보쌈고기를 내놓았다. 우리들은 두레반에 빙 둘러앉아 뒤풀이를 했다.

갓 만든 순무김치와 궁합인 보쌈고기, 그것들과 궁합인 탁주와 떡국. 뒤풀이를 하며 순무김치 맛에 대해 한 마디씩했다. 처음엔 톡 쏘고, 마지막엔 아릿하고, 중독성이 있으면서도 이름값을 할 만큼 매력이 있다는 말들….

다음 날, 늦은 아침을 먹고 음성이 집인 조카 내외가 떠나갔다. 점심 뒤에 아내도 내일 출근을 위해 서울로 올라갔다. 그 왁자지껄하던 집안의 열기를 두고 떠날 수 없어 나는 또 혼자 남았다. 그들이 남기고 간 말이며 웃음이며 함께 했던 시간들이 아까웠고, 소중했다. 혼자 남아 보니 알겠다.

예전 명절 끝에 혼자 남아 작별의 손을 흔들어주시던 고향 어머니의 심정을. 생각해 보니 떠나간 사람들이 남긴 말 한마디 표정 하나가 다 정겹게 느껴지고, 오래도록 가슴에 담아두고 싶다.

“가끔 들르겠어요” 그런 말, “기름 아끼지 말고 불 따뜻하게 때고 지내세요” 그런 말, “작은 아버지, 저 가요.” 그런 말, “여보, 추운 데 한 이틀 더 있다 올라와.” 그런 말. 어느 말 하나 금방 잊고 말기엔 너무나 아깝고 소중한 말들이다.

혼자 남아 볏짚으로 뜰안 나무들 옷을 입혀놓고 잠깐 방에 들어와 숨을 돌리는데 밖에서 귀에 익은 소리가 들린다. 펑펑 눈이 내린다. 때를 맞추어주는 시절이 아름답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