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녁에서 벗어나지 않는‘자기’찾기! 인문적 사고!(人文的 思考)
과녁에서 벗어나지 않는‘자기’찾기! 인문적 사고!(人文的 思考)
by 운영자 2015.08.11
“미디어는 단지 미디어일 뿐이다”라는 데이비드 브룩스(David Brooks)의 메시지가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이것은 우리에게 기계나 컴퓨터가 할 수 없는 다른 인간의 모습을 요구하는 시대적 물음이다.그렇다면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라고 스스로에게 물음을 구하고 자신만의 답을 찾아가는 모습을 행동으로 보여야 하는 시기가 도래한 것이다.
직관과 상상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들만이 우리에게 삶의 의미와 가치, 즐거움을 제공할 수 있다는 의미다.
이러한 요구는 결국 ‘자신은 누구이며, 자신이 배운 것으로 무엇을 하려 하는가?’또는‘무엇으로 기억되고 싶은가?’ 등에 관한 근원적인 물음을 전제하고 있다.
이제 일상은 자신의 삶에 의미와 방향을 스스로에게 묻는 일이 상시화 되어야 하고, 일상의 삶에 진솔한 독백이 필요한 시대라는 깨달음이 절실하다.
‘왜’라는 물음은 자신에게 스스로를 현실에 발을 디디게 해서, ‘자기’를 현재에 있게 하는 것이다.
즉 자신의 존재 의의와 의미를 찾아가는 여정의 출발점에 서게 한다. 우리 교육의 문제점을 굳이 꼽으라 한다면 배움과 표현에 ‘자기’가 빠져 있는 것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자기 욕망이 거세되면 어떤 상황에서도 자발성과 독립성을 보장할 수 없는 것이다. 더 나아가 자발성이 없으면 지속성과 창의성은 더욱 더 담보할 수가 없다.
활동성이 자신에게서 출발하지 않고 외부로부터의 촉발에서 비롯되는 삶 속에서는 자기 것이 좋아 보일 리가 없고, 스스로의 것에 자존감을 느낄 수가 없는 것이다. 또한 자발적이지 않는 것에는 생명력이 없다는 것을 삶이 증명해 주지 않았는가?
‘삶의 즐거움과 의미, 가치를 찾지 못하는 오늘의 허무주의 시대! 더 이상 삶의 의미를 묻지 않는 사람들!’ 이는 지금의 시대를 특징짓는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앞으로 우리가 항상 지녀야 할 실존적 물음이 ‘자신의 존재와 의미’에 주어져야 하고, 이러한 물음에 답을 찾는 고민의 과정이 현장에서 이뤄져야 한다.
이제부터라도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수동적인 삶이 아니라 자신의 삶의 의미와 목표를 스스로 찾아가는 능동적인 삶을 추구해야 한다.
‘의미 없는 존재인 인간이 의미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등의 물음을 즐기는 일상이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 사회가 상실하고 망각한 것 가운데 하나는 바로 ‘자기’를 찾아가는 여정, 그리고 ‘삶 그 자체’에 대한 감탄과 감동의 마음이 없다는 것 이다.
우리가 행복하려면 다시 살고자 원하는 그런 삶을 살아야 한다. 즉 자신의 삶이 희열과 낭만으로 점철되는 일상, 하루하루가 축제가 될 수 있도록 하는 생각의 열림과 열정만이 행복의 문으로 가는 첩경이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사람, 사물, 기계 등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감수성을 기를 수 있는 토양, 감성교육, 즉 신화(神話)교육이 요구된다.
죄라는 말의 히브리 원어는 ‘핫타스’인데, 그 어원은 ‘과녁에서 벗어나다’라는 뜻이 있다고 한다. 이 말의 뜻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 과녁의 바깥, 즉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않을 때 그 상황은 반드시 죄짓는 일과 연결될 수밖에 없다는 의미로 들린다.
과녁은 어쩌면 우리 삶의 목표, 가치, 인생관을 반영하는 인생의 나침반이다. 따라서 모든 사람이 제자리를 찾아 가는 것 또한 죄를 짓지 않는 일일 것이다.
몸은 여기 있으면서 마음은 다른 곳을 기웃거리는 것 또한 과녁을 벗어나는 일이 아닐까?
선생님이 수업에 열중하고 있을 때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거나, 다른 생각을 하는 것도 과녁을 빗나가서 죄를 짓는 일일 수 있다.
과녁에서 벗어나지 않는 삶의 자세를 유지하는 것, 모든 사람이 제자리를 찾고, 제자리로 돌아가며 제자리를 지키는 모습! 이것이 우리 인간이 추구하는 가장 멋지고 아름다운 삶의 모습이 아닐는지. 이것은 마음과 몸이 하나가 되고 모두가 한마음으로 살아가는 인류의 로망일 것이다.
사람이 아름다운 것은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를 아는 것이다.
“돌아오라. 더 늦기 전에 그대의 꽃자리를 찾아라”고 하는 조예린 시인의 말처럼 말이다.
죄가 목표를 맞추는데 실패한 것을 뜻한다면, 죄는 어떤 사람이 자신의 꿈과 희망을 품으면서도 현재 그 자리에서 할 일을 다 하지 못하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요즘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보다는 ‘어떻게 견딜 것인가?’라고 하는 문장이 나의 몸과 마음을 촉촉하게 한다. ‘출호이자 반호이자야(出乎爾者 反乎爾者也)’라는 고전 문구 하나가 거친 세상에 적극적으로 대처해 나갈 수 있도록 나에게 근력강화제의 역할을 해 주고 있다.
근력강화제인 인문학은 새로운 것을 창조하며, 올바른 가치관을 형성하고, 궁극적으로 자아와 사회공동체의 정체성 구축에 결정적으로 기여하는 삶의 지혜다.
주입식 교육에 길들여진 우리 사회에서는 인문학을 단편적인 지식으로 외우기에 바쁜 사례도 있어 씁쓸하기도 하다.
이제부터라도 인문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도록 해야 한다.
즉, 노자가 ‘무위자연(無爲自然)’을 이야기했다는 사실을 아는 것보다 ‘당시 노자는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게 됐을까?’를 고민해야 한다는 의미다.
과녁을 벗어나지 않는 삶만이 자신의 존재 의미와 가치를 찾아갈 수 있도록 자기 창조의 길을 떠나게 하고, 다시 태어나더라도 다시 그렇게 살고자 원하는 삶이 될 수 있는 자양분을 제공할 것이다.
‘Mistake’는 받아들이지 않아야 할 것을 잘못 받아들인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take’는 우리의 삶에 긍정적인 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take’의 의미를 살려 내 몸과 마음을 살찌우기 위해 받아들여야 할 목록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21세기가 바라는 인간은 현실에 발을 딛고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자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그 기반은 인문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의 구유에서 시작하며, 몸과 마음을 살찌우는 즉, 긍정적인 세계관 형성에 기여하는 ‘target+take’의 의미를 생활하는 삶이다.
이제부터라도 인문학의 쪽을 열고 일상에서 실천하는 삶이 열리기를 기대하면서 ‘죄와 잘못’의 의미가 삶의 나침반이 될 것이다.
직관과 상상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들만이 우리에게 삶의 의미와 가치, 즐거움을 제공할 수 있다는 의미다.
이러한 요구는 결국 ‘자신은 누구이며, 자신이 배운 것으로 무엇을 하려 하는가?’또는‘무엇으로 기억되고 싶은가?’ 등에 관한 근원적인 물음을 전제하고 있다.
이제 일상은 자신의 삶에 의미와 방향을 스스로에게 묻는 일이 상시화 되어야 하고, 일상의 삶에 진솔한 독백이 필요한 시대라는 깨달음이 절실하다.
‘왜’라는 물음은 자신에게 스스로를 현실에 발을 디디게 해서, ‘자기’를 현재에 있게 하는 것이다.
즉 자신의 존재 의의와 의미를 찾아가는 여정의 출발점에 서게 한다. 우리 교육의 문제점을 굳이 꼽으라 한다면 배움과 표현에 ‘자기’가 빠져 있는 것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자기 욕망이 거세되면 어떤 상황에서도 자발성과 독립성을 보장할 수 없는 것이다. 더 나아가 자발성이 없으면 지속성과 창의성은 더욱 더 담보할 수가 없다.
활동성이 자신에게서 출발하지 않고 외부로부터의 촉발에서 비롯되는 삶 속에서는 자기 것이 좋아 보일 리가 없고, 스스로의 것에 자존감을 느낄 수가 없는 것이다. 또한 자발적이지 않는 것에는 생명력이 없다는 것을 삶이 증명해 주지 않았는가?
‘삶의 즐거움과 의미, 가치를 찾지 못하는 오늘의 허무주의 시대! 더 이상 삶의 의미를 묻지 않는 사람들!’ 이는 지금의 시대를 특징짓는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앞으로 우리가 항상 지녀야 할 실존적 물음이 ‘자신의 존재와 의미’에 주어져야 하고, 이러한 물음에 답을 찾는 고민의 과정이 현장에서 이뤄져야 한다.
이제부터라도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수동적인 삶이 아니라 자신의 삶의 의미와 목표를 스스로 찾아가는 능동적인 삶을 추구해야 한다.
‘의미 없는 존재인 인간이 의미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등의 물음을 즐기는 일상이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 사회가 상실하고 망각한 것 가운데 하나는 바로 ‘자기’를 찾아가는 여정, 그리고 ‘삶 그 자체’에 대한 감탄과 감동의 마음이 없다는 것 이다.
우리가 행복하려면 다시 살고자 원하는 그런 삶을 살아야 한다. 즉 자신의 삶이 희열과 낭만으로 점철되는 일상, 하루하루가 축제가 될 수 있도록 하는 생각의 열림과 열정만이 행복의 문으로 가는 첩경이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사람, 사물, 기계 등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감수성을 기를 수 있는 토양, 감성교육, 즉 신화(神話)교육이 요구된다.
죄라는 말의 히브리 원어는 ‘핫타스’인데, 그 어원은 ‘과녁에서 벗어나다’라는 뜻이 있다고 한다. 이 말의 뜻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 과녁의 바깥, 즉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않을 때 그 상황은 반드시 죄짓는 일과 연결될 수밖에 없다는 의미로 들린다.
과녁은 어쩌면 우리 삶의 목표, 가치, 인생관을 반영하는 인생의 나침반이다. 따라서 모든 사람이 제자리를 찾아 가는 것 또한 죄를 짓지 않는 일일 것이다.
몸은 여기 있으면서 마음은 다른 곳을 기웃거리는 것 또한 과녁을 벗어나는 일이 아닐까?
선생님이 수업에 열중하고 있을 때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거나, 다른 생각을 하는 것도 과녁을 빗나가서 죄를 짓는 일일 수 있다.
과녁에서 벗어나지 않는 삶의 자세를 유지하는 것, 모든 사람이 제자리를 찾고, 제자리로 돌아가며 제자리를 지키는 모습! 이것이 우리 인간이 추구하는 가장 멋지고 아름다운 삶의 모습이 아닐는지. 이것은 마음과 몸이 하나가 되고 모두가 한마음으로 살아가는 인류의 로망일 것이다.
사람이 아름다운 것은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를 아는 것이다.
“돌아오라. 더 늦기 전에 그대의 꽃자리를 찾아라”고 하는 조예린 시인의 말처럼 말이다.
죄가 목표를 맞추는데 실패한 것을 뜻한다면, 죄는 어떤 사람이 자신의 꿈과 희망을 품으면서도 현재 그 자리에서 할 일을 다 하지 못하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요즘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보다는 ‘어떻게 견딜 것인가?’라고 하는 문장이 나의 몸과 마음을 촉촉하게 한다. ‘출호이자 반호이자야(出乎爾者 反乎爾者也)’라는 고전 문구 하나가 거친 세상에 적극적으로 대처해 나갈 수 있도록 나에게 근력강화제의 역할을 해 주고 있다.
근력강화제인 인문학은 새로운 것을 창조하며, 올바른 가치관을 형성하고, 궁극적으로 자아와 사회공동체의 정체성 구축에 결정적으로 기여하는 삶의 지혜다.
주입식 교육에 길들여진 우리 사회에서는 인문학을 단편적인 지식으로 외우기에 바쁜 사례도 있어 씁쓸하기도 하다.
이제부터라도 인문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도록 해야 한다.
즉, 노자가 ‘무위자연(無爲自然)’을 이야기했다는 사실을 아는 것보다 ‘당시 노자는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게 됐을까?’를 고민해야 한다는 의미다.
과녁을 벗어나지 않는 삶만이 자신의 존재 의미와 가치를 찾아갈 수 있도록 자기 창조의 길을 떠나게 하고, 다시 태어나더라도 다시 그렇게 살고자 원하는 삶이 될 수 있는 자양분을 제공할 것이다.
‘Mistake’는 받아들이지 않아야 할 것을 잘못 받아들인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take’는 우리의 삶에 긍정적인 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take’의 의미를 살려 내 몸과 마음을 살찌우기 위해 받아들여야 할 목록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21세기가 바라는 인간은 현실에 발을 딛고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자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그 기반은 인문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의 구유에서 시작하며, 몸과 마음을 살찌우는 즉, 긍정적인 세계관 형성에 기여하는 ‘target+take’의 의미를 생활하는 삶이다.
이제부터라도 인문학의 쪽을 열고 일상에서 실천하는 삶이 열리기를 기대하면서 ‘죄와 잘못’의 의미가 삶의 나침반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