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곡의 미루나무
통곡의 미루나무
by 운영자 2015.11.06
바람이 분다. 키 큰 미루나무 발등에 나뭇잎이 떨어져 흩날린다. 조락의 계절에 조금씩 맨몸을 드러내는 미루나무가 처연하다.빈 가지를 스쳐 가는 바람 소리도 을씨년스럽다. 서대문형무소 사형장 담장 밖 ‘통곡의 미루나무’ 앞에서니 가슴이 먹먹해진다.
미루나무엔 수많은 사람들의 생의 마지막을 지켜본 한이 켜켜이 서렸다.
‘통곡의 미루나무’ 앞은 ‘통곡의 삼거리’이다. 독립군 얼굴에 용수를 씌운 일본군이 어느 방향으로 가느냐에 따라 생사가 갈린다. 직진하면 면회소. 왼쪽으로 가면 수감자 운동 공간인 격변장, 오른쪽으로 가면 사형장이다.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면 죽음을 직감한다. 붉은 벽돌 형무소 높은 담장 안에 다시 5m 높이의 벽돌담을 둘러쳐 놓은 사형장 앞에서 독립군은 잠시 먼 하늘을 쳐다본 뒤 미루나무를 붙잡고 통한의 눈물을 쏟아낸다.
나라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죽는 것이 원통해서다. 담장 안쪽에도 1923년 사형장을 지으면서 함께 심었다는 미루나무가 있으나 성장 상태가 부실하다.
독립군과 애국지사들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본 한이 서려 잘 자라지 못한 탓이라고 한다.
‘통곡의 미루나무’가 ‘유령의 나무’처럼 음산해 보이는 것은 계절 탓만은 아니다. 목조건물인 사형장 내부에는 사형집행 배석자와 교수형에 처한 올가미가 걸려있다. 밧줄로 둥글게 만든 매듭 아래는 열리고 닫히는 나무판이 보인다.
뒤쪽엔 지하로 통하는 계단이 있고, 담장엔 시신을 몰래 반출했던 시구문을 일부 복원해 놓았다.
서울에 살면서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을 처음 들렀다. 서대문형무소는 잦은 명칭 변경만큼 우여곡절을 겪었다.
일제는 1908년 10월 이곳에 500여 명을 수용하는 ‘경성감옥’을 세웠다. 1912년 마포구 공덕동에 새로운 감옥을 신축하면서 ‘서대문감옥’으로 명칭이 바뀌었고, 1923년 서대문형무소로 개칭됐다.
광복 이후 서울교도소, 서울구치소로 이름이 바뀌면서 민주화운동 인사들이 이곳에 수감되는 등 근현대사의 굴곡이 서린 곳이다.
서울구치소가 1987년 경기도 의왕시로 이전되면서 이듬해 사형장과 3개 옥사 건물이 국가사적(제324호)으로 지정됐다.
그 뒤 옥사를 복원하고 이곳에 투옥됐던 독립운동가들의 유물과 자료를 모아 1998년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으로 개관했다.
대한민국의 독립과 민주를 향한 투쟁의 역사가 깃든 전시와 체험 공간이다.
독립운동가들의 저항과 수감생활을 보여주는 다양한 전시물 가운데 5,000여 장의 수형기록표가 눈길을 끈다.
얼굴을 달라도 독립을 향한 비장함이 서렸다. 사진과 이름, 척관법으로 표기한 키 높이, 신체 특징이 고스란히 적혀 있다.
지하 고문실은 섬뜩하다. 거꾸로 매달아 코에 물을 붓는 물고문, 손톱 밑을 찌르는 고문, 인두로 지지는 고문현장과 못이 튀어나온 상자 고문, 얼굴만 드러나는 좁은 벽관에 들어가 고통을 체험할 수 있다.
모진 고문으로 얼굴이 퉁퉁 부은 유관순의 사진을 보며 그의 순국이 국정교과서 논란이 되는 현실이 안타깝고 부끄럽다.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곳곳에 서린 수난과 저항, 목숨 걸고 나라를 되찾으려던 애국투혼 앞에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미루나무엔 수많은 사람들의 생의 마지막을 지켜본 한이 켜켜이 서렸다.
‘통곡의 미루나무’ 앞은 ‘통곡의 삼거리’이다. 독립군 얼굴에 용수를 씌운 일본군이 어느 방향으로 가느냐에 따라 생사가 갈린다. 직진하면 면회소. 왼쪽으로 가면 수감자 운동 공간인 격변장, 오른쪽으로 가면 사형장이다.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면 죽음을 직감한다. 붉은 벽돌 형무소 높은 담장 안에 다시 5m 높이의 벽돌담을 둘러쳐 놓은 사형장 앞에서 독립군은 잠시 먼 하늘을 쳐다본 뒤 미루나무를 붙잡고 통한의 눈물을 쏟아낸다.
나라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죽는 것이 원통해서다. 담장 안쪽에도 1923년 사형장을 지으면서 함께 심었다는 미루나무가 있으나 성장 상태가 부실하다.
독립군과 애국지사들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본 한이 서려 잘 자라지 못한 탓이라고 한다.
‘통곡의 미루나무’가 ‘유령의 나무’처럼 음산해 보이는 것은 계절 탓만은 아니다. 목조건물인 사형장 내부에는 사형집행 배석자와 교수형에 처한 올가미가 걸려있다. 밧줄로 둥글게 만든 매듭 아래는 열리고 닫히는 나무판이 보인다.
뒤쪽엔 지하로 통하는 계단이 있고, 담장엔 시신을 몰래 반출했던 시구문을 일부 복원해 놓았다.
서울에 살면서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을 처음 들렀다. 서대문형무소는 잦은 명칭 변경만큼 우여곡절을 겪었다.
일제는 1908년 10월 이곳에 500여 명을 수용하는 ‘경성감옥’을 세웠다. 1912년 마포구 공덕동에 새로운 감옥을 신축하면서 ‘서대문감옥’으로 명칭이 바뀌었고, 1923년 서대문형무소로 개칭됐다.
광복 이후 서울교도소, 서울구치소로 이름이 바뀌면서 민주화운동 인사들이 이곳에 수감되는 등 근현대사의 굴곡이 서린 곳이다.
서울구치소가 1987년 경기도 의왕시로 이전되면서 이듬해 사형장과 3개 옥사 건물이 국가사적(제324호)으로 지정됐다.
그 뒤 옥사를 복원하고 이곳에 투옥됐던 독립운동가들의 유물과 자료를 모아 1998년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으로 개관했다.
대한민국의 독립과 민주를 향한 투쟁의 역사가 깃든 전시와 체험 공간이다.
독립운동가들의 저항과 수감생활을 보여주는 다양한 전시물 가운데 5,000여 장의 수형기록표가 눈길을 끈다.
얼굴을 달라도 독립을 향한 비장함이 서렸다. 사진과 이름, 척관법으로 표기한 키 높이, 신체 특징이 고스란히 적혀 있다.
지하 고문실은 섬뜩하다. 거꾸로 매달아 코에 물을 붓는 물고문, 손톱 밑을 찌르는 고문, 인두로 지지는 고문현장과 못이 튀어나온 상자 고문, 얼굴만 드러나는 좁은 벽관에 들어가 고통을 체험할 수 있다.
모진 고문으로 얼굴이 퉁퉁 부은 유관순의 사진을 보며 그의 순국이 국정교과서 논란이 되는 현실이 안타깝고 부끄럽다.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곳곳에 서린 수난과 저항, 목숨 걸고 나라를 되찾으려던 애국투혼 앞에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