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질문을 못하는가?
왜 질문을 못하는가?
by 운영자 2015.12.21
“한국 기자들께 질문 기회를 드리고 싶군요. 누구 질문하실 분 없나요?”지난 2010년 서울에서 열린 G20 정상회의 폐막일 기자회견 장소였다. 오바마 미국대통령이 회의를 성공적으로 개최한 것을 치하하는 뜻으로 우리나라 기자들에게 질문을 하도록 했다.
그런데 한국기자들 가운데는 손을 드는 사람이 없었다. 오바마 대통령은 재차 물었지만 여전히 나서는 이가 없었고, 질문의 기회는 중국기자에게 넘어갔다.
나는 이 장면을 보며 낯이 매우 뜨거워졌다. 세계의 기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질문 하나도 제대로 못하는 나라! 한국인의 민낯을 고스란히 드러낸 국제적인 망신이 아닌가.
왜 우리나라 기자들은 질문을 하지 못 했을까?
외국어 실력이 짧아서였을까? 그런 것도 몰라서 묻느냐고 다른 기자들에게 눈총을 받을까봐 그랬을까? 아니면 혹시나 질문을 잘못해서 언론사 사주에게 밉보이거나 국가의 위상을 실추시키면 어쩌나 하는 염려 때문이었을까?
단언컨대, 그 어느 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국제회의에 취재를 나올 정도면 우리나라 기자들의 외국어 구사능력이 부끄러울 정도는 아닐 것이고, 미국 대통령에게 어떤 질문을 해야 할지 모를 만큼 사리분별을 못하지도 않을 것이다.
나는 우선 우리의 국민성을 생각해 본다.
우리 한국인은 본디 누구 앞에 잘 나서지 않으려는 특성이 있다. 그리고 체면을 중시해 하고 싶은 말도 되도록 자제하는 편이다. 좋게 생각하면 겸손인데, 안 좋게 보면 남의 눈치를 잘 살피는 것이다. 그러나 원인은 따로 있다고 본다.
바로, 학교교육이다.
학창시절을 한번 돌이켜 보라! 국어시간에는 선생님의 설명을 교과서에 받아 적기에 바빴고, 수학시간에는 하품을 참으며 칠판에 문제를 풀어가는 선생님의 분필 끝만 쳐다보았고, 영어시간에는 부정사니 동명사니 관계대명사니 따지며 문장구조를 분석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선생님은 질문할 기회를 주는 법 없이 “무조건 외워!”를 연발했고, 어쩌다 질문을 하는 친구가 있으면 “그런 것은 시험에 안 나와!” 하고 묵살했다.
질문을 자주 하면 진도에 차질이 생긴다고 성가셔했고, 입시문제와 상관없는 것에 관심 갖는 것을 죄악시했다.
자연히 학생들은 학습 내용에 대해서 의문점을 갖거나 이치를 탐구할 생각은 하지 않고, 어떻게든 그것을 외워서 시험에서 틀리지 않도록 하느냐 하는 데만 골몰했다.
우리나라의 학교교육이 이처럼 상급학교 입시를 위한 준비과정으로 진행돼왔기 때문에 수업시간에 질문하는 풍토는 자리 잡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학생들은 어떤 학습 내용을 보면 그것을 암기하거나 정답을 맞히려고만 했지 궁금한 점을 파고들어 의문을 제기하거나 이치를 따지는 데는 관심을 가지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
다행히 오늘날 우리 교실수업이 여러 가지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독서토론 수업이니, 배움의 공동체 수업이니, 아이 눈으로 수업 보기니 하여 여러 가지 학생 중심의 수업 방식이 도입되고 있어 반가운 생각이 든다.
나는 어떤 형태의 수업이건 학생들에게 질문을 많이 허용하는 수업이 좋다고 생각한다. 수업 시간에 토론과 질문의 기회를 많이 주고, 좋은 질문을 하는 학생들을 칭찬해줘야 한다.
그리하여 질문하는 분위기가 조성되면 학생들은 질문을 하기 위해서라도 학습에 관심을 더 기울이게 되고, 자연스레 탐구심과 창의력이 길러질 것이다.
“나는 특별한 재능이 없습니다. 다만 열정적으로 캐묻기를 좋아했을 뿐입니다.”
상대성이론을 발표한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1879~1955)의 말이다.
새로운 것의 발견이나 창조는 ‘왜?’라는 의문에서 비롯된다. 그 의문을 간질여주어 탐구심에 불을 붙이는 것이 교사가 할 일이다. 우리 교육이 진작 이런 방향으로 진행되어 왔다면 미국 대통령에게서 얻은 질문 기회를 다른 나라에 빼앗겼겠는가.
만약 우리 기자들이 질문에 익숙했더라면 그 날 오바마 대통령에게 이런 질문을 던질 수도 있지 않았을까?
“당신은 그동안 여러 차례 한국 교육을 칭찬한 바 있다. 그에 대해서 우리 국민은 대단히 기분 좋게 생각한다.
당신이 볼 때 미국 교육과 한국 교육은 어떻게 다르며, 어떤 점이 좋고 나쁜지 한 번 말해 달라!”
그런데 한국기자들 가운데는 손을 드는 사람이 없었다. 오바마 대통령은 재차 물었지만 여전히 나서는 이가 없었고, 질문의 기회는 중국기자에게 넘어갔다.
나는 이 장면을 보며 낯이 매우 뜨거워졌다. 세계의 기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질문 하나도 제대로 못하는 나라! 한국인의 민낯을 고스란히 드러낸 국제적인 망신이 아닌가.
왜 우리나라 기자들은 질문을 하지 못 했을까?
외국어 실력이 짧아서였을까? 그런 것도 몰라서 묻느냐고 다른 기자들에게 눈총을 받을까봐 그랬을까? 아니면 혹시나 질문을 잘못해서 언론사 사주에게 밉보이거나 국가의 위상을 실추시키면 어쩌나 하는 염려 때문이었을까?
단언컨대, 그 어느 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국제회의에 취재를 나올 정도면 우리나라 기자들의 외국어 구사능력이 부끄러울 정도는 아닐 것이고, 미국 대통령에게 어떤 질문을 해야 할지 모를 만큼 사리분별을 못하지도 않을 것이다.
나는 우선 우리의 국민성을 생각해 본다.
우리 한국인은 본디 누구 앞에 잘 나서지 않으려는 특성이 있다. 그리고 체면을 중시해 하고 싶은 말도 되도록 자제하는 편이다. 좋게 생각하면 겸손인데, 안 좋게 보면 남의 눈치를 잘 살피는 것이다. 그러나 원인은 따로 있다고 본다.
바로, 학교교육이다.
학창시절을 한번 돌이켜 보라! 국어시간에는 선생님의 설명을 교과서에 받아 적기에 바빴고, 수학시간에는 하품을 참으며 칠판에 문제를 풀어가는 선생님의 분필 끝만 쳐다보았고, 영어시간에는 부정사니 동명사니 관계대명사니 따지며 문장구조를 분석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선생님은 질문할 기회를 주는 법 없이 “무조건 외워!”를 연발했고, 어쩌다 질문을 하는 친구가 있으면 “그런 것은 시험에 안 나와!” 하고 묵살했다.
질문을 자주 하면 진도에 차질이 생긴다고 성가셔했고, 입시문제와 상관없는 것에 관심 갖는 것을 죄악시했다.
자연히 학생들은 학습 내용에 대해서 의문점을 갖거나 이치를 탐구할 생각은 하지 않고, 어떻게든 그것을 외워서 시험에서 틀리지 않도록 하느냐 하는 데만 골몰했다.
우리나라의 학교교육이 이처럼 상급학교 입시를 위한 준비과정으로 진행돼왔기 때문에 수업시간에 질문하는 풍토는 자리 잡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학생들은 어떤 학습 내용을 보면 그것을 암기하거나 정답을 맞히려고만 했지 궁금한 점을 파고들어 의문을 제기하거나 이치를 따지는 데는 관심을 가지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
다행히 오늘날 우리 교실수업이 여러 가지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독서토론 수업이니, 배움의 공동체 수업이니, 아이 눈으로 수업 보기니 하여 여러 가지 학생 중심의 수업 방식이 도입되고 있어 반가운 생각이 든다.
나는 어떤 형태의 수업이건 학생들에게 질문을 많이 허용하는 수업이 좋다고 생각한다. 수업 시간에 토론과 질문의 기회를 많이 주고, 좋은 질문을 하는 학생들을 칭찬해줘야 한다.
그리하여 질문하는 분위기가 조성되면 학생들은 질문을 하기 위해서라도 학습에 관심을 더 기울이게 되고, 자연스레 탐구심과 창의력이 길러질 것이다.
“나는 특별한 재능이 없습니다. 다만 열정적으로 캐묻기를 좋아했을 뿐입니다.”
상대성이론을 발표한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1879~1955)의 말이다.
새로운 것의 발견이나 창조는 ‘왜?’라는 의문에서 비롯된다. 그 의문을 간질여주어 탐구심에 불을 붙이는 것이 교사가 할 일이다. 우리 교육이 진작 이런 방향으로 진행되어 왔다면 미국 대통령에게서 얻은 질문 기회를 다른 나라에 빼앗겼겠는가.
만약 우리 기자들이 질문에 익숙했더라면 그 날 오바마 대통령에게 이런 질문을 던질 수도 있지 않았을까?
“당신은 그동안 여러 차례 한국 교육을 칭찬한 바 있다. 그에 대해서 우리 국민은 대단히 기분 좋게 생각한다.
당신이 볼 때 미국 교육과 한국 교육은 어떻게 다르며, 어떤 점이 좋고 나쁜지 한 번 말해 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