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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인우의 고전 읽기

장인우의 고전 읽기

by 운영자 2016.01.22

만복사 저포기를 읽으며
‘만복사 저포기’의 양생은 전라도 남원 사람이고, 일찍이 부모님을 여의고 홀로 살아가는 총각이다. 그도 배꽃 흐드러지게 피어나고 그 향기 은은한 달밤이면 시를 읊으며 자신의 붉은 청춘을 녹여내곤 했다.그러다가 부처님과 저포(樗蒲, 나무로 만든 주사위를 던져서 그 사위로 승부를 다투는 놀이)를 던져 내기를 하고 아름다운 여인을 만나게 된다.

사랑이 아름다울수록 애절할수록 그 사연 역시 절절한 법인데, 이 여인의 사연 역시 평범하지 않았다.

이 여인은 왜구의 난 중에 부모와 이별하고 정절을 지키며 3년간 궁벽한 곳에 묻혀서 있다가 배필을 구하던 터였다.

배필을 찾던 두 연인은 만복사 행랑채 끝에 남아 있던 매우 좁은 판자방에서 운우(雲雨)의 즐거움을 나누고, 시녀가 차려온 주안상 앞에서 합환주를 마시게 된다.

그러나 백년해로를 다짐한 이 연인의 꿀 같은 사랑은 영원할 수 없는 것이었다.

평생 건즐을 받들겠고, 사랑을 저버리지 않겠다던 황금 같은 맹약을 했지만 만복사에서 맺은 사랑 보련사에서 슬픈, 뜻밖의 이별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아가씨가 현생의 사람이 아닌 귀신이었던 것.

이후 양생은 처음 만났던 곳을 찾아가 음식을 차려놓고 지전을 불사르며, 조문을 지어 읽으며 그녀를 추모한다.

그리고 아가씨가 다시 윤회를 통해 다른 나라 남자의 몸으로 태어났다는 선몽을 했으나, 그는 다시 장가들지 않고 지리산에 들어가 약초를 캐면서 살았다고 한다. 양생이 어떻게 죽었는지 뒷일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고 한다.

‘만복사 저포기’는 환몽구조는 아니다. 만남과 사랑, 이별에 이르기까지 과정이 물 흐르듯 이어지는 순행구조이며, 현실의 이야기이다.

이승의 인물과 저승의 인물이 간절한 소원으로 맺어져 사랑을 하게 되고, 끝까지 절개를 지키며 살아가는 것이다.

명혼 소설은 당시 파격적일 수밖에 없었다. 고려시대와는 다른 철저한 유교국가로의 전환과 그 기반이 착실히 이뤄져 가는 조선 사회에서 차별과 억압은 정당한 것일 수밖에 없었고, 지조와 절개를 지켜 수절하는 것, 역시 남성이 아닌 여성의 것인 시대에 ‘은장도’가 강요되지 않은 남성의 수절이 결말을 이루는, 그야말로 파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결말이 설화적 한계를 벗어나지는 않았다. 양생이 어떻게 죽었는지 뒷일을 아는 이가 없었다는 설화적 마무리는 한계일 수 있으나, 어쩌면 그래서 지고지순한 사랑이 더욱 아릿하게 다가서는지도 모른다.

잘 먹고 잘 사는(입신양명, 부귀공명) 것도 그녀와의 이별 후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실존적’ 삶의 모습까지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단종의 비참하기 이를 데 없는 죽음은 살아남은 자, ‘생육신’이라는 멍에로 남을 수밖에 없었을지 모른다면 지나친 억측일까?

매월당 김시습이 붓을 놓았을 때, 그의 마음 속엔 어떤 감정이 어떤 느낌으로 흐르고 있었을까? 마침표를 찍고 붓을 놓았을 때, 날씨는 어땠을까? 그를 둘러싼 금오산의 정취는 어떠했을까? 문득 그를 만나고 싶어진다. 그는 거문고를 탈 줄 알았을까?

아, 이러매 눈을 감고 상상해 볼 밖에…. 아마도 작가와 독자는 오작교를 건너야만 만날 수 있는 견우와 직녀 같은, 운명 지어진 존재들인 것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