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푸르른 날은, 인생에서 가장 푸르른 시기를 빼앗긴 사람들을 그리워하자

푸르른 날은, 인생에서 가장 푸르른 시기를 빼앗긴 사람들을 그리워하자

by 운영자 2016.05.18

1980년 5월의 비극은 18년 동안 군사독재자였던 박정희의 죽음에서부터 비롯되었다.독재자의 죽음으로 민주화를 이루려던 국민들의 염원이 정권을 탈취하기 위한 전두환 장군의 쿠데타로 실현되지 못한 것이다.

일부 군부세력은 야당 지도자 김대중을 구속했다. 이어 김대중을 석방하고 계엄을 해제하라고 외치며 평화로운 시위와 집회를 벌이는 광주시민들을 상대로 공수부대를 투입, 총칼과 물리적 폭력 등으로 수많은 시민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그러나 광주 시민들은 물러나지 않았다. 분노한 시민들은 두 손을 불끈 쥐었다.

그리고 마침내 계엄군을 물리치고 10일 동안의 해방광주의 공동체를 이뤘다.

그러나 1980년 5월 27일 이른 새벽 수천 명의 계엄군은 탱크를 앞세우고 광주로 진격 시민들을 학살했다. 전두환 그는 그렇게 광주 시민을 학살하고 그렇게 대통령에 올랐지만 광주시민들은 결코 굴복하지 않고 기나긴 저항을 계속해나갔다.

학살의 진상을 규명하고 책임자를 처벌하기 위한 17년 동안의 투쟁, 그것은 참으로 어렵고 힘든 고난의 연속이었지만 또 너무도 갚진 것이었다.

역사는 광주시민들의 손을 들어 주었다. 쿠데타와 학살의 주역인 전두환과 노태우 전직 두 대통령을 법정에 세워 단죄 구속시켰다.

‘5·18광주민주화운동’은 패배가 아닌 역사의 승리였으며, 당시 광주에서 죽어간 생명들은 무의미한 희생이 아닌 부활의 영웅이었다. 그 당시는 패배한 항쟁이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오히려 그 패배를 통해 1980년대 반독재 민주의식과 민주화운동을 성장시키는 견인차로 등장한 것이다.

‘5·18광주민주화운동’은 아직까지도 진상이 완전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80년 5월 17일, 비상계엄 확대 조치 이후 광주에 공수부대를 증파한 이유는 무엇인지, 당시 광주에 투입된 공수부대를 진두지휘한 자는 누구이고, 광주시민에게 발포명령을 내린 자는 누구이며, 80년 당시 미국은 어떤 역할을 했고, 광주에서 사망한 양민은 정확히 몇 명인지 아직도 진상은 명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2015년 6월까지 집계된 인명피해자는 사망자 155명, 행불자 81명, 상이 후 사망자 110명, 상이 및 구금자 등이다.

이것은 공식통계이며 수사기간 중의 불법연행자만 하더라도 3000여 명이었으며 시위기간의 무자비한 연행은 얼마나 되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그러나 6공화국의 여소야대라는 정국 속에서 열렸던 광주특위 청문회를 통해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상이 상당부분 밝혀졌다.

하지만 당시 정부·여당은 청문회를 거듭하면서 신군부 등 기득권자들에게 직·간접으로 영향을 미치는 쟁점과 책임자 규명 문제에 있어서는 교묘한 호도책으로 일관해 완전한 진상규명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전 국민의 이름으로 진행되고 있는 ‘세기의 재판’에도 불구하고 ‘5·18광주민주화운동’의 역사적 진실을 규명하는 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그 이유는 아직도 과거의 역사적 잔재와 의식의 소유자들이 여전히 우리 사회의 각 분야에서 은밀하게 움직이며 저항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아무리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상을 왜곡하고 은폐하려 해도 반드시 국민과 정의의 힘에 의해 낱낱이 밝혀질 것이다.

‘5·18광주민주화운동’은 어제의 패배에서 벗어나 이 땅의 민주주의를 앞당긴 승리의 항쟁으로 거듭나고 있다. 현 정부가 광주항쟁을 세계사에 유래 없는 초이성적 초도덕적 투쟁이라고 규정한 만큼 이제 새로운 도약을 위한 준비를 시작해야 한다.

과거보다는 미래를 생각하고 준비한 ‘5·18광주민주화운동’의 정신 계승 방안을 위해 광주시민과 더불어 전국민이 함께 고민하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한 시대의 아픔과 절규에서 스스로 벗어나 우리 사회의 가능성과 역동성을 하나로 묶는 공동체의 실현을 통해 ‘5·18광주민주화운동’은 역사 속의 찬란한 빛으로 승화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