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느냐, 사느냐? 불꽃 튀는 언어의 각축
죽느냐, 사느냐? 불꽃 튀는 언어의 각축
by 운영자 2017.11.08
- 영화 <남한산성>을 보고
병자호란을 배경으로 한 영화 <남한산성>이 만들어진다는 소식을 듣고 오래전부터 기다려왔다. 김훈의 소설이 나온 지도 10년이 지나 이제는 책의 내용도 가물가물해진 상태다.드디어 추석을 기해 영화가 개봉됐다. 감독 이름이 생소한데, 황동혁이 누군가 했더니, 예전에 영화 <도가니>(2011)와 <수상한 그녀>(2013)를 만든 이다. 각본까지 겸한 것을 보면 상당한 실력자로 보인다.
영화는 임금의 가마 행렬이 눈길을 걸어 남한산성으로 들어가면서 시작된다.
“전하! 지금 칸에게 문서를 보내면 칸은 스스로를 황제라 칭하고 전하를 칸의 신하로 칭하라 요구할 것입니다. 명길은 전하를 앞세우고 적의 아가리 속으로 들어가려는 자이옵니다. 죽음에도 아름다운 자리가 있을진대 하필 적의 아가리 속이겠습니까?”
청과 화의를 반대하는 예조판서 김상헌은 명나라와의 의리를 중요시한다. 이에 반해 이조판서 최명길은 일단 화친을 통해 궁지에서 벗어난 다음 후일을 도모하자는 주장이다.
“적의 아가리 속에도 분명 삶의 길은 있을 것이옵니다. 상헌의 말은 지극히 의로우나 상헌이 말하는 죽음으로써 삶을 지탱하지는 못 할 것이옵니다.”
한 임금을 모시면서도 각기 신념이 다른 두 신하, 그들의 말싸움은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불꽃이 튄다. 현란한 수사를 자랑하는 김훈의 문체가 빛을 발한다. 활시위처럼 팽팽한 두 사람의 진언을 두고 임금은 어떻게 결단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다.
“척화를 하자니 오랑캐 손에 죽을까 두렵고, 오랑캐에게 살려달라는 답서를 쓰자니 만고의 역적이 될까 두려운 것이냐? 그럼 다들 이대로 주저앉아 성이 무너지길 기다려야 하는 것이냐?”
이도 저도 할 수 없는 진퇴양난의 상황, 한겨울 고립무원의 산성에 갇힌 채 접점을 찾을 수 없이 평행선을 달리는 두 인물의 각축은 영화의 갈등을 한껏 고조시킨다.
영화의 긴장과 몰입은 인물 간의 갈등관계에서 극대화된다고 볼 때, 각기 다른 성격이 맞부딪치는 <남한산성>이야말로 가장 영화적 문법에 충실한 작품이 아닐까.
“한 나라의 군왕이 어찌 만백성이 보는 앞에서 치욕스런 삶을 구걸하려 하시옵니까? 오랑캐에 무릎을 꿇고 삶을 구걸하느니 사직을 위해 죽는 것이 신의 뜻이옵니다.”
차라리 꺾일지언정 스스로 굽힐 수는 없다고 말하는 김상헌은 의리와 절개의 화신이자 대쪽 선비의 표상이다.
그 맞은편에 엎드린 최명길은 명분보다 실리를 추구하는 현실론자로서 목숨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저들이 말하는 대의와 명분은 도대체 무엇을 위한 것입니까? 삶이 있은 후에야 비로소 대의와 명분도 있는 것이 아니옵니까? 오랑캐의 발밑을 기어서라도 죽음은 견딜 수 없고 치욕은 견딜 수 있사옵니다. 만백성과 더불어 죽음을 각오하지 마시옵소서.”
역사상 가장 치열했던 47일, 나라의 운명이 그곳에 갇혔다!
영화의 홍보 문구대로 병자년 1636년 겨울 15만 오랑캐에 둘러싸여 독 안에 든 쥐 신세가 된 조정의 모습은 참담하기 그지없다.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 전전긍긍하며 버틴 치욕의 나날들, 왜란을 겪은 지 얼마나 되었다고 또 다시 임금이 궁궐을 버려야 했단 말인가! 그렇지만 스스로 판 무덤 앞에서 누구를 탓하고 원망하겠는가. 명과 후금 사이에서 균형외교를 표방하던 광해군을 몰아낸 서인의 명분이 바로 중화사상이었고, 기울어가는 명에 기대어 새로 일어난 청을 백안시한 시대착오의 결과였으니, 어찌 어리석은 조상들이었다고 혀를 차지 않을 수 있으랴!
오늘날 미국과 중국의 틈바구니에서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처지도 영화 속의 현실과 다르지 않다. 북한의 잇따른 핵실험 위협 속에서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를 놓고 두 나라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우리의 입장이 참으로 곤혹스럽다.
명분도 살리고 실리도 챙기는 해법은 없을까? 부끄러운 역사를 돌아보며 또다시 이 땅에 그와 같은 일이 재현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지금 우리가 할 일이 아닌가 싶다. 우리까지 나중에 후손들에게 어리석은 조상이었다는 소리를 들어서야 되겠는가.
영화는 임금의 가마 행렬이 눈길을 걸어 남한산성으로 들어가면서 시작된다.
“전하! 지금 칸에게 문서를 보내면 칸은 스스로를 황제라 칭하고 전하를 칸의 신하로 칭하라 요구할 것입니다. 명길은 전하를 앞세우고 적의 아가리 속으로 들어가려는 자이옵니다. 죽음에도 아름다운 자리가 있을진대 하필 적의 아가리 속이겠습니까?”
청과 화의를 반대하는 예조판서 김상헌은 명나라와의 의리를 중요시한다. 이에 반해 이조판서 최명길은 일단 화친을 통해 궁지에서 벗어난 다음 후일을 도모하자는 주장이다.
“적의 아가리 속에도 분명 삶의 길은 있을 것이옵니다. 상헌의 말은 지극히 의로우나 상헌이 말하는 죽음으로써 삶을 지탱하지는 못 할 것이옵니다.”
한 임금을 모시면서도 각기 신념이 다른 두 신하, 그들의 말싸움은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불꽃이 튄다. 현란한 수사를 자랑하는 김훈의 문체가 빛을 발한다. 활시위처럼 팽팽한 두 사람의 진언을 두고 임금은 어떻게 결단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다.
“척화를 하자니 오랑캐 손에 죽을까 두렵고, 오랑캐에게 살려달라는 답서를 쓰자니 만고의 역적이 될까 두려운 것이냐? 그럼 다들 이대로 주저앉아 성이 무너지길 기다려야 하는 것이냐?”
이도 저도 할 수 없는 진퇴양난의 상황, 한겨울 고립무원의 산성에 갇힌 채 접점을 찾을 수 없이 평행선을 달리는 두 인물의 각축은 영화의 갈등을 한껏 고조시킨다.
영화의 긴장과 몰입은 인물 간의 갈등관계에서 극대화된다고 볼 때, 각기 다른 성격이 맞부딪치는 <남한산성>이야말로 가장 영화적 문법에 충실한 작품이 아닐까.
“한 나라의 군왕이 어찌 만백성이 보는 앞에서 치욕스런 삶을 구걸하려 하시옵니까? 오랑캐에 무릎을 꿇고 삶을 구걸하느니 사직을 위해 죽는 것이 신의 뜻이옵니다.”
차라리 꺾일지언정 스스로 굽힐 수는 없다고 말하는 김상헌은 의리와 절개의 화신이자 대쪽 선비의 표상이다.
그 맞은편에 엎드린 최명길은 명분보다 실리를 추구하는 현실론자로서 목숨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저들이 말하는 대의와 명분은 도대체 무엇을 위한 것입니까? 삶이 있은 후에야 비로소 대의와 명분도 있는 것이 아니옵니까? 오랑캐의 발밑을 기어서라도 죽음은 견딜 수 없고 치욕은 견딜 수 있사옵니다. 만백성과 더불어 죽음을 각오하지 마시옵소서.”
역사상 가장 치열했던 47일, 나라의 운명이 그곳에 갇혔다!
영화의 홍보 문구대로 병자년 1636년 겨울 15만 오랑캐에 둘러싸여 독 안에 든 쥐 신세가 된 조정의 모습은 참담하기 그지없다.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 전전긍긍하며 버틴 치욕의 나날들, 왜란을 겪은 지 얼마나 되었다고 또 다시 임금이 궁궐을 버려야 했단 말인가! 그렇지만 스스로 판 무덤 앞에서 누구를 탓하고 원망하겠는가. 명과 후금 사이에서 균형외교를 표방하던 광해군을 몰아낸 서인의 명분이 바로 중화사상이었고, 기울어가는 명에 기대어 새로 일어난 청을 백안시한 시대착오의 결과였으니, 어찌 어리석은 조상들이었다고 혀를 차지 않을 수 있으랴!
오늘날 미국과 중국의 틈바구니에서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처지도 영화 속의 현실과 다르지 않다. 북한의 잇따른 핵실험 위협 속에서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를 놓고 두 나라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우리의 입장이 참으로 곤혹스럽다.
명분도 살리고 실리도 챙기는 해법은 없을까? 부끄러운 역사를 돌아보며 또다시 이 땅에 그와 같은 일이 재현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지금 우리가 할 일이 아닌가 싶다. 우리까지 나중에 후손들에게 어리석은 조상이었다는 소리를 들어서야 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