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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뱃돈의 진화

세뱃돈의 진화

by 순천광양교차로신문 2018.02.09

민족의 큰 명절 설이 코앞에 다가왔다. 어른들은 제사상 차림과 세뱃돈 걱정이 앞서고, 아이들은 세뱃돈을 얼마나 받을지 기대에 부푼다.세월 따라 세배와 세뱃돈의 풍속도 많이 변했다. 한국전쟁과 보릿고개 시절을 겪은 세대들에게 세뱃돈은 언감생심 바라지도 않았다.

세배한 뒤 덕담 듣고 바삭바삭한 한과와 오방색 물감들인 달콤한 사탕을 얻어먹는 것만으로도 설이 달콤했다.

어쩌다 10원짜리 지폐를 세뱃돈으로 받으면 입이 함지박처럼 벌어졌다. 60년대 1원이면 왕사탕을 다섯 개 살 수 있었으니 코흘리개에겐 큰돈이다.

그 시절 주전부리가 흔하지 않았기에 용돈의 필요성이 절박하지 않았다.

구멍가게에 들러 유리구슬과 과자를 사고 풍선 뽑기를 하거나 길거리서 풀빵과 달고나를 사 먹는 게 고작이었다.

이웃 어른들께 세배하고 절값 받던 시절이 있었다. 남의 집 어른들에게 우르르 몰려가 세배하는 풍습은 1970년대까지 이어졌다. 세뱃돈이 적으면 “겨우 요거야” 돌아서 투덜거렸다.

안 주는 집을 향해 욕하기도 했다. 가난뱅이 집은 찾아가지도 않는 등 부작용이 심해지자 슬그머니 자취를 감췄다.

세뱃돈은 세월과 함께 진화를 거듭했다. 화폐 발행과 경기도 세뱃돈에 영향을 끼쳤다.

1982년 500원짜리 지폐가 동전으로 바뀌면서 세뱃돈 최소단위가 1000원으로 껑충 뛰었다.

세뱃돈을 담은 봉투에 용도를 적어 줘야 하는 데 500원짜리 동전을 넣고 쓰는 건 아무래도 인색하고 꺼림칙해서다.

그 무렵 물가가 뜀박질하며 축의금과 부조금이 오르자 80년대 중반 세뱃돈도 덩달아 올라 5000원대에 진입했다.

1990년대 경제성장이 본격화되면서 세뱃돈이 만 원 단위로 올랐지만 IMF를 겪으며 하향곡선을 긋기도 했다. 5만원권 등장 이후 세뱃돈도 인플레이션이 발생하여 부모들의 부담은 커졌다.

한때 영화배우 그레이스 켈리가 2달러짜리 지폐를 받은 후 모나코 왕비가 됐다는 소식과 함께 2달러 등 외국화폐 세뱃돈 세트가 인기를 끌었다.

문화상품권이 보편화된 2000년대 접어들어 현금 대신 주는 사람들이 늘었다. 책을 사거나 영화를 볼 수 있어 청소년들에겐 효용 가치가 높았다.

스마트폰의 대중화와 함께 등장한 것이 기프트콘(모바일 상품권)이다.

인터넷에서 구입하여 스마트폰으로 전송해 주니 편해지기는 했지만 편해진 만큼 삭막해졌다.

최근엔 가상화폐 투자 바람과 함께 비트코인 기념주화가 새로운 세뱃돈으로 주목받으며 수입 판매가 부쩍 늘어났다고 한다.

세뱃돈을 주고받는 문화는 중국에서 전해졌다는 설이 일반적이다. 최대 명절인 춘절(春節) 때 미혼 자녀들에게 ‘돈을 벌라’는 의미로 덕담과 함께 붉은 봉투 ‘홍바우’에 돈을 넣어 줬던 풍속이 우리에게 전해졌다.

세뱃돈은 돈의 씨앗으로 생각했고 복돈이라 불렀다. 설날에 연 대신 드론을 날리는 세상이 됐어도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은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세배의 의미와 세뱃돈에 담긴 마음이다.

절을 하자마자 “세뱃돈은요?”하며 손을 내미는 아이들에게 덕담과 함께 돈의 소중함과 쓰임새를 알려줘야 한다.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끈끈한 정의(情誼)를 잊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