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다시, 쓰다

다시, 쓰다

by 김민정박사 2018.03.26

봄이면 버릇처럼 전정가윌 만진다감귤나무 생목숨 다비한지 10년 만에
아들놈 첫 월급 털어
감귤나무 또 심는다

생각 없이 받아든 몇 푼의 폐원보상비
참깨 기장 양배추 별별 농사 다 해봤다
세상에 공짜가 어딨냐, 도로아미타불 같은

서둘러 일수 찍듯 밭으로 나서는 길
죽어라 김을 매도 돌아서면 무성한
이 땅에
몸으로 쓰는,
몸으로 쓰는 영농일기
- 문순자의 「다시, 쓰다」 전문

벌써 3월도 중순을 지났다. 다른 곳도 바쁘겠지만, 3월이면 무지 바쁜 곳이 학교이다. 일 년 교육의 시작이라 계획도 많고, 해야 할 일도 많아 정신이 없다.

학생들 파악하며 면담하랴, 학부모 면담하랴, 수업 진도 나가랴, 학교일 처리하랴 정신없이 바쁘다. 담임이 없어도 바쁘기는 마찬가지다. 그 바쁜 가운데 꽃씨를 뿌리기 위해 화단정리를 하고 꽃씨를 뿌렸다.

일 년 농사의 시작이 봄의 씨뿌리기부터 시작이니, 농부의 마음을 비로소 알 것 같아 위의 시조가 마음에 와닿는다. 봄에 씨를 뿌리고, 나뭇가지를 전정하며 한 해를 시작하는 농부의 마음, 영농일기를 다시 쓰는 봄을 맞은 농부 마음을 알 것 같다.

작년 가을 코스모스 씨를 뿌려둔 곳에서는 벌써 조그만 싹이 나오기 시작하여 신기하여 들여다보기도 하였던 터라 바쁘게 꽃씨를 뿌리고 싶었는데, 씨를 심으려 했더니, 땅이 안 보인다.

몇 년 동안 화단에 쌓인 낙엽과 전정하고 버려둔 나뭇가지와 저절로 싹이 나고 자라 뿌리까지 깊고 길게 늘어뜨린 풀들이 화단을 점령하고 있다. 그 많은 낙엽과 나뭇가지들과 풀들을 제거하며 땅이 보일 때까지 정리했다.

화단의 작은 구석을 정리하는데도 며칠이란 시간이 흘렀다. 물론 하루 종일 일할 시간은 없고, 수업이 없는 시간에 급한 일부터 처리하고 나서 자투리 시간을 이용하다 보니 세월은 벌써 3월 하순으로 넘어가고 있다.

3월 10일경 씨를 심는 것이 좋다고 하였는데, 화단을 정리하다가 2주의 시간이 흘러간 것이다. 지금 심어야만 가을에 꽃을 볼 수 있을 터이니 늦출 수도 없는 일, 모든 것은 때가 있어 그 시기를 놓치면 안 되는 것이니 서둘 수밖에 없다.

학교 화단에 노랗게 핀 산수유꽃이 어제의 눈보라에도 아랑곳없이 꽃을 환하게 달고 있으니 오는 봄을 어찌 막을 것인가. 매화봉오리가 곧 활짝 꽃을 피울 준비를 하고 있고, 백목련과 자목련도 꽃 피울 준비로 봉오리가 한창 부풀고 있으니 지금 우리 학교 화단은 대단히 분주하다.

자연은 스스로 때가 왔음을 미리 알고, 소리 없이 준비하면서도 조용하기만 하다. 자연은 그렇게 소리 없이 움직이는 것인지…. 아니면 봄이 오는 소리가 너무 커서 우리의 귀가 미처 못 듣고 있는 것인지….

작은 화단에 겨우 꽃씨 몇 줌 뿌려보며 봄날 논밭에 씨 뿌리는 농부 마음을 이해하려 하다니, 언어도단인가? 싹이 잘 틀까 걱정하며 씨앗을 뿌리고, 싹이 나고 나면 또 함께 자라나는 풀과 전쟁하고, 가뭄이 들면 가뭄 걱정, 홍수가 나면 홍수 걱정, 농작물과 하나 되어 가꾸고 보살피며 농사를 짓는 그들의 마음을 이해하게 된다.

알곡 한 톨, 사과 한 쪽, 귤 한쪽도 감사하고 아끼며 먹어야겠다는 생각을 새삼 하게 되니, 이 봄에 나는 다시 철이 드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