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대한 결정권
죽음에 대한 결정권
by 정운스님 2018.05.15
‘위엄 있게 죽고 싶다’는 사람이 있다. 죽기 위해 호주의 어느 과학자는 스위스로 떠났다. 104세로서 안락사가 허용된 스위스를 선택한 것이다.필자가 이 글을 쓰는 날[5월 10일], 그는 돌아올 수 없는 먼 길을 떠난다.
그 호주 과학자는 1979년 은퇴한 후에도 계속 연구를 이어온 그는 과학 연구 업적을 인정받아 호주 정부로부터 훈장까지 수여한 인물이다. 지난달 호주 ABC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이 나이에 이른 것이 대단히 후회된다.”며 “행복하지 않다.
딱히 슬프지는 않지만 죽고 싶다. 이런 (삶의 마감이) 방해받는다면 그게 더 슬픈 일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더 이상 불행하고 싶지 않아 품위 있는 죽음을 맞고 싶은데, 중병을 앓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독립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것들이 자꾸 사라진다며 스스로 삶을 마감하겠다는 주장이다.
혹 중병이나 암으로 곧 세상을 떠날 수밖에 없는 경우라면, 안락사를 신청해도 억지로나마 수긍할 수 있다. 하지만 ‘나이가 많다’, ‘삶이 구차하다’, ‘행복하지 않다’, ‘삶의 독립적 선택을 하고 싶다’는 것으로 안락사를 선택한다는 것에는 절대 반대이다.
어느 누구든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처럼 죽음 또한 죽고 싶다고 자신이 선택해서 죽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작은 형태에서 완전한 형태로 그리고 다시 작은 존재로 변화되어 죽음으로 향하는 것이 이 세상 존재의 실체이다. 이 세상 모든 존재는 생주이멸生住異滅의 과정이 자연스러운 법이다.
죽음이란 결코 마지막도, 단절도 아니다. 필자의 아버지는 2년 전에 폐렴으로 병에 입원했는데 4개월가량 중환자실에 있다가 돌아가셨다.
중환자실에 들어갔을 때부터 의식이 없었고, 산소호흡기로 겨우 연명했다. 필자가 승려여서 그런지 생명 연장이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족들은 최대한 의학의 힘을 빌리고자 했지만 가실 분은 가셨다.
그런데 이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삶과 죽음이란 한 사람만의 역사가 아니라 가족들과 지인들이 함께하는 역사라고….
고인은 자손들에게 죽음을 통해 진정한 사랑과 가족애, 삶의 소중함을 일깨워준 것이다. 그리고 고인도 의식은 비록 흐릿했겠지만 자손들과 이별하는 시간을 두고, 서서히 마지막을 준비하면서 축복 속에 떠났다고 생각한다.
그러기에 죽음이 결코 슬픈 것만은 아니다. 불교에서는 죽음을 다시 삶을 받기 위한 과정으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보며, 참 죽음이란 삶과 죽음이라는 것조차 집착하지 않고 떠나는 것을 말한다.
종교를 떠나서 인간의 삶과 죽음은 자연이 정해준 것이다. 자연의 순리대로 생을 받았듯이 죽음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호주의 과학자는 90세가 넘으면서부터 삶의 의미를 잃었다고 하지만, 그분만이 인생 후배들에게 들려줄 수 있는 삶의 이야기는 많다고 생각된다.
고령의 사람이 하는 말은 곧 우리에게 ‘인생을 진지하게 바라보는 역사가 되지 않을까?’… 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 글을 쓰는 시점, 그분은 고인이 되었을 것이다. 고인의 선택을 폄훼하고자 하는 의도는 아니다. 어쨌든 편히 영면에 들길 바랄 뿐이다.
그 호주 과학자는 1979년 은퇴한 후에도 계속 연구를 이어온 그는 과학 연구 업적을 인정받아 호주 정부로부터 훈장까지 수여한 인물이다. 지난달 호주 ABC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이 나이에 이른 것이 대단히 후회된다.”며 “행복하지 않다.
딱히 슬프지는 않지만 죽고 싶다. 이런 (삶의 마감이) 방해받는다면 그게 더 슬픈 일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더 이상 불행하고 싶지 않아 품위 있는 죽음을 맞고 싶은데, 중병을 앓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독립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것들이 자꾸 사라진다며 스스로 삶을 마감하겠다는 주장이다.
혹 중병이나 암으로 곧 세상을 떠날 수밖에 없는 경우라면, 안락사를 신청해도 억지로나마 수긍할 수 있다. 하지만 ‘나이가 많다’, ‘삶이 구차하다’, ‘행복하지 않다’, ‘삶의 독립적 선택을 하고 싶다’는 것으로 안락사를 선택한다는 것에는 절대 반대이다.
어느 누구든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처럼 죽음 또한 죽고 싶다고 자신이 선택해서 죽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작은 형태에서 완전한 형태로 그리고 다시 작은 존재로 변화되어 죽음으로 향하는 것이 이 세상 존재의 실체이다. 이 세상 모든 존재는 생주이멸生住異滅의 과정이 자연스러운 법이다.
죽음이란 결코 마지막도, 단절도 아니다. 필자의 아버지는 2년 전에 폐렴으로 병에 입원했는데 4개월가량 중환자실에 있다가 돌아가셨다.
중환자실에 들어갔을 때부터 의식이 없었고, 산소호흡기로 겨우 연명했다. 필자가 승려여서 그런지 생명 연장이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족들은 최대한 의학의 힘을 빌리고자 했지만 가실 분은 가셨다.
그런데 이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삶과 죽음이란 한 사람만의 역사가 아니라 가족들과 지인들이 함께하는 역사라고….
고인은 자손들에게 죽음을 통해 진정한 사랑과 가족애, 삶의 소중함을 일깨워준 것이다. 그리고 고인도 의식은 비록 흐릿했겠지만 자손들과 이별하는 시간을 두고, 서서히 마지막을 준비하면서 축복 속에 떠났다고 생각한다.
그러기에 죽음이 결코 슬픈 것만은 아니다. 불교에서는 죽음을 다시 삶을 받기 위한 과정으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보며, 참 죽음이란 삶과 죽음이라는 것조차 집착하지 않고 떠나는 것을 말한다.
종교를 떠나서 인간의 삶과 죽음은 자연이 정해준 것이다. 자연의 순리대로 생을 받았듯이 죽음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호주의 과학자는 90세가 넘으면서부터 삶의 의미를 잃었다고 하지만, 그분만이 인생 후배들에게 들려줄 수 있는 삶의 이야기는 많다고 생각된다.
고령의 사람이 하는 말은 곧 우리에게 ‘인생을 진지하게 바라보는 역사가 되지 않을까?’… 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 글을 쓰는 시점, 그분은 고인이 되었을 것이다. 고인의 선택을 폄훼하고자 하는 의도는 아니다. 어쨌든 편히 영면에 들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