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이 하늘의 반을 떠받든다
여성이 하늘의 반을 떠받든다
by 김회진 기자 kimhj0031@hanmail.net 2018.07.24
1636년 병자호란이 끝난 뒤 청나라 병사들이 조선의 여성들을 중국으로 끌고 갔다.그 끌려간 여인들 중에는 수치스럽다고 자살하는 경우도 있었고, 돈을 주고 고향에 돌아오거나 일부는 도망쳐 나온 여인도 있었다.
또 청나라에 도착하자, 조선의 여인이 쓰일 데 없다는 이유로 고국에 돌려보내지기도 하였다. 어떠한 상황이든 청나라에서 다시 고국으로 돌아오는 여인들을 ‘환향녀還鄕女’라고 불렀다.
사대부들은 이런 여성들을 치욕스런 일이라고 하여 집에 들어오기 전에 홍제동 개울에서 몸을 씻게 하였다.
한편 환향녀의 시댁에서는 이혼을 강요당하거나 제사를 지낼 때도 정조를 잃은 여인이라고 하여 제사 행사에 참여할 수 없었다. 물론 조정에서는 이혼을 할 수 없도록 입법화했지만, 현실적으로 그렇지 못했다.
환향녀들은 청나라에서 어떤 일을 당했는지 모른다며, 주위 사람들조차 거리를 두었고, 절개를 잃었다고 사람들한테 손가락질을 당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그런데 이 ‘환향녀’ 단어가 조신하지 못한 여인을 의미하는 욕으로 변질되어 쓰이고 있다. 바로 그들은 우리들의 어머니이고, 할머니이다.
한편 서울의 이태원동도 지역명의 유래가 두 가지이다. 첫째는 배나무가 많이 나는 지역이어서 ‘이梨’ 자를 쓴 이태원梨泰院이라고 했다고 한다.
둘째는 임진왜란 때, 왜인들한테 불미스런 일을 당해 왜인의 아이를 임신한 경우, 아이와 산모들이 한 지역에 모여 살도록 했는데, 이곳이 다를 ‘이異’자와 아이 밸 ‘태胎’자를 써서 이태원異胎院으로 표기했다고 한다.
이태원이라는 이름이 후자인 경우와 환향녀는 전쟁의 상흔이 낳은 우리나라 여인들의 비극이다. 역사적으로 전쟁은 남자들의 그릇된 사유에서 나오고, 현실적으로 고통받는 가장 피해자는 여인들이었다. 이렇게 피해를 당하고도 모자라 역사적으로 여인들은 늘 패자, 아웃사이더로서 찬밥 신세가 되어왔다.
그 반론의 주인공들을 보자. 조선시대만 해도 강인한 여인들이 많았다. 병자호란으로 인해 인조는 청나라에 수치를 당한 뒤 소현세자와 세자빈이 청나라로 잡혀갔다. 세자빈 강씨(1611~1646)는 청나라에서도 강인하게 견디며, 꽤 많은 부를 축적했다.
결국 조선으로 돌아와 세자가 타계한 후 세자빈도 죽음을 당해야 했지만, 그 당시 여인으로서의 세자빈은 강인하면서도 지략이 뛰어난 사람이다. 또한 제주도의 대상인 김만덕(1739~1812)이 있다.
김만덕은 관비의 딸로 태어났지만, 장사를 해서 부를 축적한 뒤 수많은 이들에게 자선을 베풀었다. 또 사도세자의 부인이자,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1735~1815) 또한 뛰어난 여성으로 인정받는다.
이외 수많은 여인들의 힘이 있어 우리나라 역사가 흘러왔다. 곧 역사를 빛낸 50%는 여인들이었다.
중국 사회주의 혁명을 일으킨 마오쩌둥은 ‘여성이 하늘의 반을 떠받친다[婦女能頂半邊天]’고 하여 여성들을 ‘반변천半邊天’이라고 불렀다.
곧 새로운 사회에서 여성의 역량이 남성과 동일하다는 뜻이다. 이 세상에 귀하지 않은 존재는 없다. 딸로 태어났을 때나 아들로 태어날 때나 똑같이 산모의 아픔으로 태어난 존재들이다.
필자는 여성인권을 주장하지 않는다. 이는 곧 남성에 대한 반감정이 담겨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남성이나 여성이나 똑같은 인간으로서의 동등한 인권을 바랄 뿐이다.
또 청나라에 도착하자, 조선의 여인이 쓰일 데 없다는 이유로 고국에 돌려보내지기도 하였다. 어떠한 상황이든 청나라에서 다시 고국으로 돌아오는 여인들을 ‘환향녀還鄕女’라고 불렀다.
사대부들은 이런 여성들을 치욕스런 일이라고 하여 집에 들어오기 전에 홍제동 개울에서 몸을 씻게 하였다.
한편 환향녀의 시댁에서는 이혼을 강요당하거나 제사를 지낼 때도 정조를 잃은 여인이라고 하여 제사 행사에 참여할 수 없었다. 물론 조정에서는 이혼을 할 수 없도록 입법화했지만, 현실적으로 그렇지 못했다.
환향녀들은 청나라에서 어떤 일을 당했는지 모른다며, 주위 사람들조차 거리를 두었고, 절개를 잃었다고 사람들한테 손가락질을 당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그런데 이 ‘환향녀’ 단어가 조신하지 못한 여인을 의미하는 욕으로 변질되어 쓰이고 있다. 바로 그들은 우리들의 어머니이고, 할머니이다.
한편 서울의 이태원동도 지역명의 유래가 두 가지이다. 첫째는 배나무가 많이 나는 지역이어서 ‘이梨’ 자를 쓴 이태원梨泰院이라고 했다고 한다.
둘째는 임진왜란 때, 왜인들한테 불미스런 일을 당해 왜인의 아이를 임신한 경우, 아이와 산모들이 한 지역에 모여 살도록 했는데, 이곳이 다를 ‘이異’자와 아이 밸 ‘태胎’자를 써서 이태원異胎院으로 표기했다고 한다.
이태원이라는 이름이 후자인 경우와 환향녀는 전쟁의 상흔이 낳은 우리나라 여인들의 비극이다. 역사적으로 전쟁은 남자들의 그릇된 사유에서 나오고, 현실적으로 고통받는 가장 피해자는 여인들이었다. 이렇게 피해를 당하고도 모자라 역사적으로 여인들은 늘 패자, 아웃사이더로서 찬밥 신세가 되어왔다.
그 반론의 주인공들을 보자. 조선시대만 해도 강인한 여인들이 많았다. 병자호란으로 인해 인조는 청나라에 수치를 당한 뒤 소현세자와 세자빈이 청나라로 잡혀갔다. 세자빈 강씨(1611~1646)는 청나라에서도 강인하게 견디며, 꽤 많은 부를 축적했다.
결국 조선으로 돌아와 세자가 타계한 후 세자빈도 죽음을 당해야 했지만, 그 당시 여인으로서의 세자빈은 강인하면서도 지략이 뛰어난 사람이다. 또한 제주도의 대상인 김만덕(1739~1812)이 있다.
김만덕은 관비의 딸로 태어났지만, 장사를 해서 부를 축적한 뒤 수많은 이들에게 자선을 베풀었다. 또 사도세자의 부인이자,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1735~1815) 또한 뛰어난 여성으로 인정받는다.
이외 수많은 여인들의 힘이 있어 우리나라 역사가 흘러왔다. 곧 역사를 빛낸 50%는 여인들이었다.
중국 사회주의 혁명을 일으킨 마오쩌둥은 ‘여성이 하늘의 반을 떠받친다[婦女能頂半邊天]’고 하여 여성들을 ‘반변천半邊天’이라고 불렀다.
곧 새로운 사회에서 여성의 역량이 남성과 동일하다는 뜻이다. 이 세상에 귀하지 않은 존재는 없다. 딸로 태어났을 때나 아들로 태어날 때나 똑같이 산모의 아픔으로 태어난 존재들이다.
필자는 여성인권을 주장하지 않는다. 이는 곧 남성에 대한 반감정이 담겨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남성이나 여성이나 똑같은 인간으로서의 동등한 인권을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