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공정성 잣대가 궁금하다

공정성 잣대가 궁금하다

by 이규섭 시인 2018.09.07

‘우우우∼우우∼’ 허밍으로 시작되는 드라마 ‘모래시계’의 주제곡 ‘백학(Crane)’을 다시 듣는다.‘백학’을 부른 러시아 국민 가수 이오시프 꼬브존(Losif Kobzon)이 8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는 부음기사를 보고 나서다. 장중하고 엄숙한 목소리가 묵직하게 다가온다.

낮은 음색은 떨림과 울림이 교차하며 가슴 깊숙이 파고든다. 허밍은 음울한 시대의 거리를 스치는 바람 소리로 들린다. 23년의 세월이 흘렀어도 드라마 저변에 흐르던 청회색 빛 선율과 감흥이 되살아난다.

노랫말엔 세계 2차 대전 때 전사한 러시아 병사들의 영혼이 백학이 되어 돌아온다는 애절한 이야기가 담겼다. 러시아 전승기념일에 애창되는 ‘국민가요’가 드라마와 함께 한국의 안방에 울려 퍼졌다. 1995년 꼬브존 내한 공연 때 ‘백학’을 들으려 공연장을 찾을 만큼 그 노래에 흠뻑 빠졌다.

‘모래시계’는 1995년 1월 9일부터 2월 16일까지 24부작으로 방영되어 폭발적인 인기와 숱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처음으로 다룬 드라마로 방영 시간 거리는 한산했다. ‘모래시계’를 ‘귀가시계’라고 했다.

초고속 인터넷으로 다시보기를 즐길 수 없었던 시절 본방 고수 풍경이다. 평균 시청률 50.8%를 유지하다 최민수가 사형장에서 “나 떨고 있니?” 명대사를 남긴 마지막 회는 64.5%를 기록하며 휘나레를 장식했다. 수도권 방송이었던 SBS가 드라마 영향에 힘입어 4개 지방 민방을 개국하는 계기가 됐다.

드라마 종영 후 혜린(고현정)이 체포되는 장면을 찍은 강릉 정동진 일대는 관광 명소로 떠올랐다. 대형 모래시계가 설치되고 이용객이 없어 폐역이 고려되던 정동진역은 활선어 같은 활기가 넘쳤다.

플랫 홈엔 조각품이 설치됐고, 해풍에도 꿋꿋한 소나무는 ‘혜린이 소나무’로 거듭났다. 극중 재희(이정재) 영향으로 검도 붐이 일기도 했다.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에 이어 ‘모래시계’ 연출로 드라마의 새 지평을 연 김종학 PD는 2013년 백학을 타고 이승을 떠나 충격을 주었다.

척박한 제작 풍토를 극복하지 못하고 극단적 선택을 했다. 드라마 ‘모래시계’는 지난해 뮤지컬로 화려한 변신을 했고, 스크린을 통해 부활할 것으로 보인다.

영화 기획사가 베트남 1위 기업과 공동투자 계획서를 지난 8월에 체결했다는 보도다. 어떤 시각으로 감동을 재현할지 기대된다.

요즘은 시청률을 확 끌어올렸다는 소문난 드라마가 없다. 패륜과 불륜 등을 버무린 막장 드라마도 약효가 떨어진 모양이다.

탄탄한 시청률을 기록한 정통 사극과 대하드라마도 브라운관에서 자취를 감췄다. KBS는 22년 동안 방송한 ‘TV소설’을 폐지했다. 현존 유일의 근대사 배경의 시대극으로 주부들이 즐겨 보는 아침 시간대 드라마다.

가을 개편과 함께 ‘시청자 칼럼, 우리가 사는 세상’도 20년 만에 없앴다. 시청자들의 참여로 민원을 해결해 온 공영성 높은 프로그램이다.

소비자 권익보호에 앞장서 온 ‘소비자 리포트’도 사라졌다. 그 대신 시사 토크쇼와 예능 프로그램이 전진 배치된다고 한다. 시청료를 받는 공영방송의 공정성 잣대가 무엇인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