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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상처와 가을의 모감주나무 꽃

여름의 상처와 가을의 모감주나무 꽃

by 강판권교수 2018.09.17

‘살인적인’ 더위와 태풍은 인간을 비롯한 많은 생명체들에게 적잖은 상처를 주었다.그러나 생명체들의 삶은 여름에만 상처를 입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상처투성이다.

어떤 생명체든 상처 없이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나무들도 늘 상처를 받으면서 살아간다.

올해의 경우 아주 더운 탓에 나무들의 고통이 그 어느 해보다 컸다.

나무들의 가장 고통스러운 상처는 후손을 남기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이다.

꽃이 필 즈음 폭염을 만나면 벌과 나비들의 활동도 쉽지 않아 모든 꽃에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경우가 생긴다.

내가 자주 다니는 곳에서 모감주나무가 가을인데도 다시 꽃을 피웠다. 초여름에 꽃이 피는 모감주나무의 일부에서 다시 꽃이 피었다는 것은 열매를 맺지 못했다는 뜻이다.

지금 모감주나무에는 많은 열매들이 가을 하늘의 기운을 받으면서 익어가고 있다. 그러나 모감주나무가 일부 가지에서 다시 꽃을 피우는 것은 혹시라도 열매를 맺을 수 있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다.

모감주나무의 그런 기대가 실현될지 알 수 없지만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감동이다.

아울러 모감주나무가 기약 없이 다시 꽃을 피우는 것은 상처를 치유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래서 모감주나무가 다시 꽃을 피워서 열매를 맺는가의 문제는 결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열매를 맺는가의 여부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치유하는 노력이다.

무환자나뭇과의 갈잎큰키나무 모감주나무의 열매는 염주를 만드는데 아주 긴요하다.

‘근심을 없게 하는 열매’를 의미하는 ‘무환자(無患子)’처럼, 모감주나무의 열매로 만드는 염주도 번뇌를 없애는 도구다.

모감주나무의 열매 주머니는 아주 화려한 황금 왕관처럼 생긴 꽃과 달리 아주 수수한 꽈리처럼 생겼다. 꽈리가 검게 변하면 주머니 속에 5개 정도의 열매가 얼굴을 내민다.

그러나 올해 내가 근무하는 곳의 모감주나무에는 열매가 많이 열렸지만 적잖은 열매가 바람에 떨어졌다. 나는 떨어진 열매를 주워서 바구니에 담아두었다.

떨어진 열매는 아주 고운 연두색이지만 속을 열어보면 씨앗을 거의 만들지 못했다. 씨앗을 제대로 만들지 못하면 떨어진 열매도 후손을 만들 수 없다.

그러나 씨앗을 만들지 못한 열매라고 해서 전혀 쓸모없는 것은 아니다. 떨어진 모감주나무 열매는 개미를 비롯한 많은 생명체들에게는 꼭 필요하다.

기후의 변화는 많은 생명체들의 삶을 변화시킨다. 모감주나무의 꽃처럼 그동안 일정한 시기에 꽃을 피우던 나무들의 삶도 앞으로 많은 변화를 겪을 것이다.

나무의 삶이 바뀌면 인간의 삶도 반드시 변할 수밖에 없다. 인간의 삶은 지금까지 식물의 삶에 절대적인 영향을 받아왔고,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이기 때문이다.

오동나뭇잎이 떨어지면 가을이 온 것을 알듯이, 모감주나무의 꽃이 가을에 다시 핀다는 것은 앞으로 많은 변화가 있다는 징조다. 인간은 식물의 모습을 통해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

그러나 간혹 가을에 모감주나무의 꽃을 보고 ‘미쳤다’고 말하는 자들이 있다. 변화를 예견하는 나무에게 지혜를 배우기는커녕 모독하는 인간은 미래가 없다.

언제나 겸손한 자세로 나무의 삶을 관찰하면 인간의 미래도 훨씬 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