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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 굿 나이트’ 그 희미한 지평선

‘댓 굿 나이트’ 그 희미한 지평선

by 이보람 기자 shr5525@hanmail.net 2018.09.20

세월이 지날수록 지평선은 희미해진다.인생 후반부에 들어선 사람이라면 다가오는 죽음의 시각을, 희미해지는 지평선으로 느낄지 모르겠다. 누구든 죽음은 피할 수 없다. 다만 홀연히 세상을 뜨고 싶을 뿐이다.

귀국하는 나고야 발 비행기 속에서 나는 그를 만났다. ‘인디아나 존스’와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에 출연했던, 영국 여왕으로부터 작위를 받은 배우 존 허트.

영화 ‘댓 굿 나이트’에 등장한 그는 유명 시나리오 작가 랄프다. 유명 작가답게 저택에 살고 있는 구제불능의 그를 이해하는 일은 골치 아프다.

그는 자기 식대로의 온전한 자유를 누리며 살고, 유명작가 시절에 만난 젊고 아름다운 아내 애나를 곁에 두고 산다.

하지만 그에겐 그가 쓰고 있는 챙이 부서지고 낡은 모자처럼 남아있는 인생의 지평선이 희미하다.

어느 날, 랄프는 심장 장애로 앰뷸런스에 실려 병원에 간다. 거기서 살 날이 그리 많지 않다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는다.

그는 자신에게 닥쳐온 이 불길한 죽음을 앞에 두고 하나 밖에 없는 아들, 마이클을 떠올린다. 곁에 아내가 있지만 젊은 아내에게 머지않아 닥칠 자신의 죽음을 알린다는 게 두렵다.

랄프는 아들을 만나 자신의 죽음을 알리고 싶었고, 재산을 넘겨주고 싶었다. 그는 도시에 나가 사는 아들을 불렀다. 모처럼 아들과 단둘이 자신의 앞날을 이야기하길 원했다.

그러나 마이클은 여자 친구 캐시와 함께 왔다. 이 구제불능의 아버지는 그게 싫었다.

“뭐라고 마이클! 이 아가씨가 임신했다고? 그럼 돈을 주마. 임신 중절 수술비. 네게 필요한 돈이라면 나는 얼마든지 대 주어왔잖니?”

그 말에 마이클은 아버지와 만난 걸 후회한다.

“아버지는 언제나 그랬어요. 필요하다면 군말 없이 돈을 주셨지만 늘 사랑이 부족했어요.”

오랜만에 만난 부자는 그렇게 싸우고 헤어졌다.

집이 빈 사이 랄프는 노후인생을 설계해주는 이의 방문을 받고, 그로부터 지금 곧 홀연히 이 세상을 떠날 수 있는 주사를 맞는다. 병과 싸우는 모습을 가족들에게 보여주기 싫었다.

나뭇그늘에 누워 죽음을 맞지만 그늘이 비켜가고 해가 드는 사이 죽음에서 깨어난다.

아버지가 걱정되어 다시 찾아온 아들로부터 뜻밖의 말을 듣는다.

“7개월 후면 할아버지가 된다구요, 아빠.”

아들 마이클의 말에 랄프는 혼자 중얼거린다. “아빠? 아빠라고?” 너무도 오랜만에 들어보는 ‘아빠’라는 말에 감동하며 랄프는 그 7개월을 기다리며 당장 죽기를 바라던 희망을 거둔다. 하지만 피할 수 없는 죽음의 늪으로 빠져드는 랄프.

그 무렵 비행기는 인천공항에 착륙했고, 끝나지 않은 영화를 두고 아쉽지만 일어섰다.

‘That good night’은 어떤 모습의 행복한 밤일까. 인터넷을 열었지만 그 어디에도 리뷰는 없다. 다만 안타까운 건 영화가 개봉도 되기 전에 존 허트가 암으로 사망했다는 소식이다.

아, 그랬구나! 그토록 사실감 있는 그의 연기가 어쩌면 그의 사적 아픔과 고뇌에서 나왔겠구나. 나고야 여행이 한 편의 영화 ‘댓 굿 나이트’에 서서히 묻혀가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