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구정 아래
반구정 아래
by 김민정박사 2018.10.22
이울 대로 이운 가을 다시 찾아 왔습니다임진강가 갈대들도 제 머리가 무거운지
뻣뻣한 고갤 숙이며 옛 생각에 잠깁니다
너도 옳다, 너도 옳다, 편 가르지 않았으니
어찌 보면 우유부단, 손가락질 당했을 법
조금 더 높은 곳 바라 끌어안은 맘입니다
- 졸시, 「반구정 아래」전문
10월도 중순을 지나 가을이 깊어가고 있다. 작년 한국여성시조문학회에서 파주 부근으로 가을 기행을 다녀왔다.
최경창 묘소 아래 만든 홍랑의 가묘도 보았고, 또 DMZ 안에 있어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동의보감을 지은 허준 묘소도 찾아가 보았다. 그런가 하면 조선시대의 천재 시인으로 알려진 이옥봉의 묘소 등에도 갔는데, 나는 일찍 귀가하는 바람에 못 보아 애석했었다.
임진강가의 반구정에도 가 보았는데, 갈대가 휘날리는 임진강의 모습이 시원하게 잘 보였다. 반구정은 조선시대 세종 때의 명재상이었던 황희(黃喜, 1363~1452)정승이 지은 곳이다.
그는 세종이 실제 전권을 행사하기 시작한 세종 4년부터 판서, 좌·우의정, 영의정으로 세종과 함께 했다. 세종 사망 1년 전까지 18년 동안 영의정을 하기도 했다.
황희에게는 많은 일화가 전해지는데 하녀 둘이 싸우다가 황희에게 와서 하소연했다. 한 하녀가 자기의 사정을 이야기하자 황희가 말했다. “네 말이 옳구나.” 그러자 다른 하녀가 자기가 옳다고 주장했다. “네 말도 옳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부인이 말했다. “두 사람이 서로 반대의 이야기를 하는데 둘이 다 옳다고 하시면 어떻게 됩니까? 한 사람은 틀려야지요.” 황희가 말했다. “당신의 말도 옳소.”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이 일화는 우유부단의 상징처럼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배려의 미덕이 깊이 깔려 있는, 더 높은 차원의 화합을 바라서가 아니었을까.
개혁이 많았던 세종 때 새로운 개혁정치를 하면서 수없이 많은 반대에 부딪쳤을 때, 또 새로운 글자 한글을 만들면서 세종은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며 그들을 설득시키느라 힘들었을 것이다.
그럴 때 황희 정승 같은 어질고 현명한 분이 계셔서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너도 옳고, 너도 옳다고 다독이며 더 큰 화합으로 이끌어 갔을 것이다.
황희정승을 생각하며 썼던 이 시조를 보내주었더니 작년에 반구정에 함께 갔던 파주시인에게서 답장이 왔다. “올해 파주백일장에 ‘너도 옳고, 너도 옳다’라는 시제가 나왔었다.”고. 뭔가 이심전심으로 통하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이 시에 대한 세상을 살다 보면 서로의 이해관계가 얽혀 서로의 이익과 권리에만 눈이 멀 때가 있다. 서로의 입장을 바꾸어 보면 상대방의 모습이 보일 것이다.
그리고 그 마음들을 끌어안을 수 있는 조금 더 높은 차원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익을수록 머리를 숙이는 벼처럼, 조금 더 겸손하고 겸허하게 인생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자세가 필요하다.
모든 곡식과 과일이 저답게 익어가 맛이 들고 성숙해 가듯이 이 가을에 우리들의 인격도 자기답게 성숙하고 익어가서 저마다 고유의 제맛과 빛을 내면 정말 좋겠다.
단풍잎은 단풍빛깔을 내고, 은행잎은 은행빛깔을 내듯이 우리의 삶도 그렇게 서로가 제 빛깔을 낸다면 너도 옳고, 너도 옳은 세상이 되지 않을까.
뻣뻣한 고갤 숙이며 옛 생각에 잠깁니다
너도 옳다, 너도 옳다, 편 가르지 않았으니
어찌 보면 우유부단, 손가락질 당했을 법
조금 더 높은 곳 바라 끌어안은 맘입니다
- 졸시, 「반구정 아래」전문
10월도 중순을 지나 가을이 깊어가고 있다. 작년 한국여성시조문학회에서 파주 부근으로 가을 기행을 다녀왔다.
최경창 묘소 아래 만든 홍랑의 가묘도 보았고, 또 DMZ 안에 있어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동의보감을 지은 허준 묘소도 찾아가 보았다. 그런가 하면 조선시대의 천재 시인으로 알려진 이옥봉의 묘소 등에도 갔는데, 나는 일찍 귀가하는 바람에 못 보아 애석했었다.
임진강가의 반구정에도 가 보았는데, 갈대가 휘날리는 임진강의 모습이 시원하게 잘 보였다. 반구정은 조선시대 세종 때의 명재상이었던 황희(黃喜, 1363~1452)정승이 지은 곳이다.
그는 세종이 실제 전권을 행사하기 시작한 세종 4년부터 판서, 좌·우의정, 영의정으로 세종과 함께 했다. 세종 사망 1년 전까지 18년 동안 영의정을 하기도 했다.
황희에게는 많은 일화가 전해지는데 하녀 둘이 싸우다가 황희에게 와서 하소연했다. 한 하녀가 자기의 사정을 이야기하자 황희가 말했다. “네 말이 옳구나.” 그러자 다른 하녀가 자기가 옳다고 주장했다. “네 말도 옳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부인이 말했다. “두 사람이 서로 반대의 이야기를 하는데 둘이 다 옳다고 하시면 어떻게 됩니까? 한 사람은 틀려야지요.” 황희가 말했다. “당신의 말도 옳소.”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이 일화는 우유부단의 상징처럼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배려의 미덕이 깊이 깔려 있는, 더 높은 차원의 화합을 바라서가 아니었을까.
개혁이 많았던 세종 때 새로운 개혁정치를 하면서 수없이 많은 반대에 부딪쳤을 때, 또 새로운 글자 한글을 만들면서 세종은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며 그들을 설득시키느라 힘들었을 것이다.
그럴 때 황희 정승 같은 어질고 현명한 분이 계셔서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너도 옳고, 너도 옳다고 다독이며 더 큰 화합으로 이끌어 갔을 것이다.
황희정승을 생각하며 썼던 이 시조를 보내주었더니 작년에 반구정에 함께 갔던 파주시인에게서 답장이 왔다. “올해 파주백일장에 ‘너도 옳고, 너도 옳다’라는 시제가 나왔었다.”고. 뭔가 이심전심으로 통하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이 시에 대한 세상을 살다 보면 서로의 이해관계가 얽혀 서로의 이익과 권리에만 눈이 멀 때가 있다. 서로의 입장을 바꾸어 보면 상대방의 모습이 보일 것이다.
그리고 그 마음들을 끌어안을 수 있는 조금 더 높은 차원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익을수록 머리를 숙이는 벼처럼, 조금 더 겸손하고 겸허하게 인생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자세가 필요하다.
모든 곡식과 과일이 저답게 익어가 맛이 들고 성숙해 가듯이 이 가을에 우리들의 인격도 자기답게 성숙하고 익어가서 저마다 고유의 제맛과 빛을 내면 정말 좋겠다.
단풍잎은 단풍빛깔을 내고, 은행잎은 은행빛깔을 내듯이 우리의 삶도 그렇게 서로가 제 빛깔을 낸다면 너도 옳고, 너도 옳은 세상이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