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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이 준 선물

첫눈이 준 선물

by 김재은 작가 2018.12.04

입동이 지난지 꽤 된 듯한데 아파트 뒤뜰에 가을 잎들이 낙엽으로 쌓여 가을의 끝자락을 잡고 뭉그적거리는 사이에 첫눈이 왔다. 그러고 보니 첫눈이 온다는 소설이 막 지났다.늦잠을 자는 경우가 거의 없는데 주말 아침 기억나지 않는 꿈을 꾸다가 시간이 한참 지났다는 생각에 벌떡 일어났다.

이 시간이 어두울 리가 없다는 생각에 비가 오는 건가 하며 아파트 뒤편 미타사 비탈길을 내려다보니 와, 엄청난 눈이 내리고 있었다.

잠시 아직 내가 잠에서 덜 깬 것은 아닌가 눈을 의심했지만 첫눈이 틀림없었다. 그것도 함박눈, 거침없이 흩날리며 쏟아붓는데 한겨울의 그것을 압도하는 절경이었다.

초대하지 않은 '화려한 손님'이 이렇게 다짜고짜 들이닥치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 밖에는 없었다. 어찌 할 지 모르고 쩔쩔매는 내 모습을 숨긴 채 순간 인생을 떠올렸다.

불현듯 찾아온 사랑, 로또복권 당첨 같은 횡재, 예기치 않았던 엄청나게 좋은 일들이 생기더라도 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허탈하기도 했다.

좋은 일이 생기면 기분이 좋은 것은 불문가지이지만 스스로 땀 흘리지 않고 그냥 얻으면 뭔가 개운하지 않다.

한편으로는 횡재가 다른 일탈로 이어져 잘못 채워진 첫 단추처럼 삶의 악순환이 일어나기도 한다.

결국 평소 나눔 습관이 있거나 나눔 정신이 몸에 배어있지 않으면 거저 생긴 돈은 불행의 씨앗이 될 수도 있다.

이런 생각에 이르자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가끔씩 불로소득, 무임승차 같은 공짜심리가 고개를 들고 일어나는데 이것의 본질이나 향후 파장을 잘 인식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조금 표현을 달리하면 뜻하지 않은 횡재는 물거품이나 흘러가는 바람과 별반 차이가 없다는 느낌도 든다. 세상의 그 무엇 하나도 그냥 얻을 수 있는 게 없다는 진리를 다시 확인하면서.

첫눈 하나에 뭔 이야기가 이리도 많으냐고 구박해도 상관없다. 전혀 기대하지 못했던 첫눈이 준 느낌에 순간 흥분해서 지껄인(?) 것이라 이해해주면 좋겠지만.

경제적 고통에 삶이 고단할수록 대박을 꿈꾸는 사람이 많지만 정작 이를 위한 준비를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막연히 기다리고 기대하고 있을 뿐이다. 로또 복권의 당첨을 위해서는 로또라도 사야 하는데 말이다.

다시 인생을 돌아보면 우리네 일상은 소박함의 연속이다. 그러니 뭔가를 얻고 싶으면 소박함에서 얻어야 한다. 소박함을 놓치면 행복한 인생도 멀어질 수밖에 없다. 다만 함박눈 같은 대박이 우연히 찾아오면 그냥 그대로 즐기면 될 뿐이다.

오늘 흘리는 땀방울이 결국 나의 행복의 밑거름이 된다. 이렇게 첫눈은 나에게 인생의 귀한 가르침을 주고, 불꽃튀는 격한 사랑이 한 차례 쓸고 가듯이 흔적도 없이 녹아 사라졌다. 첫눈이 오긴 온 걸까 하는 생각에 대한 확신이 희미해진다.

얼마 전 아침 졸린 눈으로 만난 첫눈이 어쨌거나 선물처럼 내 삶에 들어왔다. 그것이 대박이든 소박이든 그리 중요하지 않다. 다만 삶의 소중한 지혜를 한 아름 안겨주고 갔으니 서설(瑞雪)임엔 틀림이 없는 것 같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첫눈, 여러모로 녹록지 않은 세상살이에 좋은 기운이 깃든 소박(素朴) 같은 대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