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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섶에서

꽃섶에서

by 김민정 박사 2019.03.25

움츠린 세상일들 이제야 불이 붙는,견고한 물소리도 봄볕에 꺾여 진다
하늘은 시치미 떼고 나 몰라라 앉은 날

산등성 머리맡을 가지런히 헤집으며
내밀한 언어 속을 계절이 오고 있다
느꺼이 꺼내서 닦는, 다 못 그린 풍경화

고요한 길목으로 아득히 길을 내며
봉오리 꿈이 한 채, 그 안에 내가 들면
소슬히 구름 꽃 피우고 깨금발로 가는 봄날
- 졸시, 「꽃섶에서」 전문

남쪽으로부터 봄소식이 전해지고 있다. 유채화가 피고, 매화가 꽃망울을 터트리고 있다. 지난 겨울은 참으로 추웠건만 신통하게도 봄은 또 이렇게 오고 있다.

경쾌한 리듬을 타고 빠르게 오고 있다. 매일 미세먼지와 싸우며 살아가는 봄날인데도 뾰족뾰족 잎을 내밀고 있는 나무들이 신기롭고, 꽃망울을 달며 꽃을 피우고 있는 매화나무가, 산수유나무가 그지없이 고맙다.

봄비가 내리고 있는 날이다. 나무들은 더욱 촉촉하고 땅도 굳었던 몸을 풀고, 새싹을 밀어낼 것이다. 이수복의 시 봄비가 생각나기도 하는 계절이다.

‘이 비 그치면/ 내 마음 강나루 긴 언덕에/ 서러운 풀빛이 짙어 오것다/ 푸르른 보리밭길/ 맑은 하늘에/ 종달새만 무어라고 지껄이것다/ 이 비 그치면/ 시새워 벙글어질 고운 꽃밭 속/ 처녀애들 짝하여 새로이 서고/ 임 앞에 타오르는/ 향연과 같이/ 땅에선 또 아지랑이 타오르것다’ - 이수복 「봄비」 전문. 머지않아 다가올 아름다운 봄날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사별한 임에 대한 애잔한 슬픔과 그리움을 나타내는 작품이다.

봄이 오면 따뜻한 날씨와 함께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겠지만, 그 아지랑이는 ‘임 앞에 타오르는’ 향불의 연기와도 같은 것으로 여겨져 풀빛이 서럽다고 화자는 말하고 있다.

아무리 꽃이 피고 새가 우는 봄날이 객관적으로 아름다워도, 보고 듣는 사람의 마음에 고민이 있거나 슬픔이 있을 때에는 그것을 아름다움으로 느낄 수도 없고, 다가오지도 않는다.

우리의 마음이 세상을 받아들일 때에는 객관보다 주관이 먼저 작용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봄비의 작가 이수복도 봄이 되어 풀빛이 짙어오는 것을 ‘서러운 풀빛’이라고 했을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날들은 언제나 기쁨만으로 출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온전히 봄을 봄으로 느끼며 움트는 생명의 신비를, 피어나는 꽃의 아름다움을 충만한 감정으로 느끼는 사람이 많기를 이 봄날에 기원해 본다.

조금이라도 마음의 여유가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세상은 갈수록 팍팍하고 경제의 흐름도 원활하지 않고, 들려오는 소식도 우울한 것이 많다.

‘예언의 나팔이 되어다오. 오 바람이여, 겨울이 오면 봄이 멀지 않으리’란 셀리의 시 속에서 희망을 찾던 사람들이여. 계절의 봄이 와 희망의 싹이 돋고 꽃이 피어날 때, 인생의 봄날도 찾아와 더욱 활기차고 희망찬 날들이 되면 좋겠다.

겨우내 얼음이 녹아 맑은 시내가 졸졸 소리 내어 흐르듯이, 겨울잠에서 깬 나목들이 서둘러 잎과 꽃을 피우듯이 우리들의 삶에도 활력이 솟는 봄이 되어 여기저기서 희망의 소리, 행복의 소리들이 들려오면 정말 좋겠다.

젊은이들의 일자리도 많아지고, 경제도 활력이 돌아 자신의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꽃처럼 삶의 꽃을 피우고, 그러한 꽃섶에서 맞는 아름다운 봄날이 되기를 기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