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곶자왈의 천리향

곶자왈의 천리향

by 한희철 목사 2019.03.27

오랜만에 제주도를 다녀오며 그중 인상 깊게 남은 것이 곶자왈을 방문한 일입니다.곶자왈(Jeju Gotjawal)은 ‘숲’을 뜻하는 제주도 사투리인 ‘곶’과 ‘돌’(자갈, 바위)을 뜻하는 ‘자왈’을 합쳐 만든 글자라 합니다.

화산이 분출할 때 점성이 높은 용암이 크고 작은 바위 덩어리로 쪼개져 요철 지형이 만들어지면서 나무와 덩굴식물 등이 뒤섞여 원시림의 숲을 이룬 곳을 이르는 제주도의 고유어인 것이지요.

곶자왈이 제주도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이유는 과거에는 경작이 불가능하여 개발로부터 격리되어 버려진 땅이었지만, 환경의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는 오늘날에는 오히려 자연 생태계가 잘 보존되어 있어 자연자원과 생태계의 보전가치가 높은 지역이 되었다는 점입니다.

떨어진 낙엽이 흙 1cm로 변하는데 필요한 시간이 약 2백 년이라 하니 토양의 발달이 빈약한 곶자왈 용암지대는 식물이 자라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식생의 발달속도가 느릴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과 같은 숲이 형성되기 위해서는 얼마나 시간을 필요로 했을까, 숲을 바라보는 마음이 가벼울 수가 없었습니다.

곶자왈을 새롭게 바라보게 된 데에는 숲 해설사의 도움이 컸는데, 숲을 해설하는 사람이 참으로 소중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곶자왈에서 들었던 이야기 중에는 천리향에 관한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숲 곳곳에 천리향이 피어 있었는데, 초입에도 천리향이 피어 있었던지라 해설사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천리향은 말 그대로 꽃의 향기가 천리를 간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었습니다. 푸른 하늘 은하수에서 서쪽 나라로 가고 있는 하얀 쪽배에는 계수나무 한 그루와 토끼 한 마리가 있다고 노래하는데, 노랫말에 나오는 계수나무가 천리향을 의미한다고도 합니다. 중국에서는 좋은 향기가 나는 나무에 ‘계(桂)’자를 붙여주었기 때문입니다.

천리향은 동굴과 같은 어두운 곳에서도 잘 피어나는데, 그러기 위해서 꽃이 선택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향기입니다. 향기가 진하고 멀리 가야 벌을 부를 수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또 하나의 놀라운 비밀이 천리향 속에 감추어져 있었습니다.

천리향을 찾아온 벌이 가장 먼저 찾는 꽃송이는 향이 가장 진한 송이였습니다. 작은 꽃봉오리가 여러 개 달려 있을 때, 가장 향이 좋은 꽃봉오리부터 찾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순간, 벌이 입을 맞춘 꽃봉오리는 향기가 사라진다고 했습니다. 그래야 다른 꽃들이 벌을 만날 수가 있기 때문이지요.

불빛이 꺼지듯 모든 꽃봉오리를 벌이 다 찾도록 향기가 사라지던 중에 벌이 모든 꽃봉오리를 다 찾게 되면 그때 다시 향기가 퍼지기 시작한다니, 천리향은 신비로운 꽃이었습니다.

숲 해설사로부터 듣는 천리향 이야기가 은은하고 깊은 천리향의 향기처럼 신선했습니다.

천리를 간다는 향은 코로 맡을 수 있는 향보다는, 다른 꽃봉오리를 위해 내 향을 접는 귀한 마음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남보다 앞서려 하고, 앞선 것을 지키기 위해 어색한 일도 마다하지 않는 인간이 머리 숙여 배워야 할 향기의 이유가 그곳에 있다 싶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