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만에 지킨 식사 약속
10년 만에 지킨 식사 약속
by 이규섭 시인 2019.05.10
휴대폰 벨이 울린다. 낯선 전화다. 받을까 말까 잠시 망설인다. 지역번호가 있는 유선전화다. “받아야겠다”는 감이 와서 받았다. 수화기 너머로 내 이름을 확인한다.“맞습니다. 누구시지요” 정중하게 물었다.
“나 ○○○이요” 언론계 대선배다.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청력도 좋다.
“식사 한번 했으면 하는데 언제 시간이 납니까?”
일정 조율 끝에 이틀 뒤 점심 약속을 했다. 무엇 때문에 만나자는 걸까?. 그것이 궁금하다. 오래전 퇴직기자 단체에서 발행하는 월간 회보에 그 선배를 인터뷰한 기억이 떠올라 자료를 뒤졌다.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당시 미수(米壽)였으니 지금은 아흔여덟이 아닌가. 회보 편집위원으로 활동하며 매월 원로 언론인 한 분씩 60여 명을 인터뷰하여 시리즈로 소개했다.
선정 기준은 550여 명의 회원 가운데 현역 시절 두드러진 활동과 연령순이다.
인터뷰 섭외를 했으나 “내세울 것이 없다”며 거절한다.
언론인회 회장이 나섰다. “내세울 것이 없다니요, 겸양의 말씀입니다. 언론계 대선배로 건강하게 지내시는 것만도 후배들에겐 귀감이 됩니다” 설득 끝에 인터뷰가 어렵게 이뤄졌다.
대답은 짧고 질문은 길어진다. 원고 매수 채우기 힘들겠다는 조바심이 든다. 인터뷰이(Interviewee)의 자료를 제대로 준비해야 깊이 있는 질문으로 내면의 생각을 끌어낼 수 있는데 워낙 단답형이라 기본이 흔들린다.
“아무것도 한 일이 없다”는 겸양에도 불구하고 그는 언론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1945년 언론계에 첫발을 내디딘 후 S신문 창간 편집국장 등을 지냈다.
한국언론연구원(한국언론진흥재단 전신) 원장으로 언론인생 2막을 열었다. 재직 10여 년 동안 ‘한국신문백년지(韓國新聞百年誌)’를 비롯하여 ‘언론비화’, ‘한국언론인물지(韓國言論人物誌)’ ‘사설선집(社說選集)’ 편찬 등 언론자료를 집대성하여 언론 발전은 물론 언론학 연구의 밑거름이 됐다.
특히 기자들의 인성과 전문성 강화 재교육에 심혈을 쏟았다. 그 뒤 신문사 CEO를 끝으로 언론 외길의 대미를 장식했다.
점심 식사 장소는 ‘○○구락부’. 이름께나 날리는 분들이 회원제로 운영되는 음식점이란 걸 들은 바 있다. “찾아가겠다.”고 했더니 “찾기 어렵다”며 프레스센터에서 만나 택시로 이동했다.
남산 숲세권 고급맨션 꼭대기 층이다. 인터넷을 검색해도 깜깜이다.
100세가 눈앞인데도 정정하다. 술·담배 멀리 한지 오래됐고, 가벼운 산책으로 건강을 유지한다.
신문 사설은 꼭 챙겨 본다니 ‘쟁이 근성’은 버리지 못하는가 보다. 거주하는 용인에서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 서울에 나와 지인들과 만나 담소하고 식사하면 일주일이 금방 간다는 것.
10년 전 인터뷰가 끝난 뒤 “회보 나오면 식사 한번 합시다” 약속한 게 생각나 언론인 단체에 전화하여 나의 연락처를 알아냈다고 한다.
“언제 식사 한 번 합시다” 흔히 남발하는 인사치레가 아닌가. 식언(食言)을 밥 먹듯이 하는 세상에 10년 전에 한 식사 약속을 지킨 인생 선배에게 삶의 엄중함과 경외심을 느낀다.
“나 ○○○이요” 언론계 대선배다.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청력도 좋다.
“식사 한번 했으면 하는데 언제 시간이 납니까?”
일정 조율 끝에 이틀 뒤 점심 약속을 했다. 무엇 때문에 만나자는 걸까?. 그것이 궁금하다. 오래전 퇴직기자 단체에서 발행하는 월간 회보에 그 선배를 인터뷰한 기억이 떠올라 자료를 뒤졌다.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당시 미수(米壽)였으니 지금은 아흔여덟이 아닌가. 회보 편집위원으로 활동하며 매월 원로 언론인 한 분씩 60여 명을 인터뷰하여 시리즈로 소개했다.
선정 기준은 550여 명의 회원 가운데 현역 시절 두드러진 활동과 연령순이다.
인터뷰 섭외를 했으나 “내세울 것이 없다”며 거절한다.
언론인회 회장이 나섰다. “내세울 것이 없다니요, 겸양의 말씀입니다. 언론계 대선배로 건강하게 지내시는 것만도 후배들에겐 귀감이 됩니다” 설득 끝에 인터뷰가 어렵게 이뤄졌다.
대답은 짧고 질문은 길어진다. 원고 매수 채우기 힘들겠다는 조바심이 든다. 인터뷰이(Interviewee)의 자료를 제대로 준비해야 깊이 있는 질문으로 내면의 생각을 끌어낼 수 있는데 워낙 단답형이라 기본이 흔들린다.
“아무것도 한 일이 없다”는 겸양에도 불구하고 그는 언론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1945년 언론계에 첫발을 내디딘 후 S신문 창간 편집국장 등을 지냈다.
한국언론연구원(한국언론진흥재단 전신) 원장으로 언론인생 2막을 열었다. 재직 10여 년 동안 ‘한국신문백년지(韓國新聞百年誌)’를 비롯하여 ‘언론비화’, ‘한국언론인물지(韓國言論人物誌)’ ‘사설선집(社說選集)’ 편찬 등 언론자료를 집대성하여 언론 발전은 물론 언론학 연구의 밑거름이 됐다.
특히 기자들의 인성과 전문성 강화 재교육에 심혈을 쏟았다. 그 뒤 신문사 CEO를 끝으로 언론 외길의 대미를 장식했다.
점심 식사 장소는 ‘○○구락부’. 이름께나 날리는 분들이 회원제로 운영되는 음식점이란 걸 들은 바 있다. “찾아가겠다.”고 했더니 “찾기 어렵다”며 프레스센터에서 만나 택시로 이동했다.
남산 숲세권 고급맨션 꼭대기 층이다. 인터넷을 검색해도 깜깜이다.
100세가 눈앞인데도 정정하다. 술·담배 멀리 한지 오래됐고, 가벼운 산책으로 건강을 유지한다.
신문 사설은 꼭 챙겨 본다니 ‘쟁이 근성’은 버리지 못하는가 보다. 거주하는 용인에서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 서울에 나와 지인들과 만나 담소하고 식사하면 일주일이 금방 간다는 것.
10년 전 인터뷰가 끝난 뒤 “회보 나오면 식사 한번 합시다” 약속한 게 생각나 언론인 단체에 전화하여 나의 연락처를 알아냈다고 한다.
“언제 식사 한 번 합시다” 흔히 남발하는 인사치레가 아닌가. 식언(食言)을 밥 먹듯이 하는 세상에 10년 전에 한 식사 약속을 지킨 인생 선배에게 삶의 엄중함과 경외심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