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씨앗과 같은책

씨앗과 같은책

by 운영자 2011.11.23

지난주 속초를 다녀왔습니다. 예전의 속초는 강원도의 구석진 끄트머리 아주 먼 곳이다 싶었는데, 새로 난 길을 통해 달리자 잠깐인 듯 도착을 했습니다.

물론 같이 동행하는 이들과 이야기를 나눴던 것이 시간을 잊게 했던 큰 이유였지만 말이지요. 우리나라가 발전하고 있는 모습을 그 중 잘 확인할 수 있는 것이 곳곳을 이어주는 도로가 아닐까 싶습니다.

굽이굽이 미시령 고개를 넘던 불편이 새로 뚫린 터널을 지나는 것으로 대체되었는데, 미시령을 쉽게 넘는 것이 편하기도 했지만 아쉬운 마음도 들었습니다.

도서관을 운영하는 이들과 같이 속초를 찾았던 것은 장로님 한 분을 만나기 위해서였습니다. 인생에 있어서나 신앙에 있어서나 여러 가지로 존경을 받을 만한 분이 서울을 떠나 속초에 살고 있습니다.

장로님을 만나 뵙고 이야기를 나누면 그 자체로 많은 것을 느끼고 배우고 도전이 되겠다 싶어 길을 나섰던 것입니다.

장로님은 현관까지 마중을 나오셨습니다. 예의 따뜻하고 겸손한 모습이 변함 없으셨습니다. 거실에 앉아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장로님은 그곳 속초에서도 독서모임을 이끌고 있었는데, 참석하는 이들은 열 서너 명, 그런데도 모임을 위해 준비하는 자료는 모두가 감탄할 만큼 양도 많았고 내용도 충실한 것이었습니다.

동행한 누군가가 준비하는 것에 비해선 참석하는 이들이 너무 적은 것 아닌가 질문을 했을 때, 장로님의 대답은 망설임이 없었습니다. 숫자가 무엇 중요하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무엇보다 마음에 와 닿았던 것은 책을 기증한 일이었습니다. 외지다면 외진 물치교회에 장서 2만5천여 권의 도서관이 마련되었는데, 그 일은 장로님의 책 기증으로부터 시작된 일이었습니다.

장로님은 당신이 가지고 있던 책 7천여 권을 기증을 했습니다. 한 달에 50권 내지 100권정도 꾸준히 구입하여 읽어온 그동안의 책을 도서관에 기증을 했던 것입니다.

한 권 한 권 소중하지 않은 책이 따로 없었을 터이고, 책을 좋아하는 이가 책을 얼마나 아끼는지에 대해서는 그곳을 찾은 모든 이들이 다 느끼고 있는 것인데, 그 많은 책들을 아낌없이 기증하는 마음이 어떤 것이었을지 잘 짐작이 되질 않았습니다.

묵직한 충격과 감동을 느낄 때 누군가가 조심스럽게 질문을 하였습니다. 이렇게 외진 곳에서 과연 누가 얼마나 읽겠느냐는 질문이었습니다.

희생은 값지고 아름답지만 과연 그 희생에 걸맞은 결과가 있겠느냐는, 어쩌면 당연하고 어쩌면 통속적인 질문이었습니다.

장로님의 대답이 궁금했습니다. 장로님이라고 왜 그런 생각을 갖지 않았을까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기증하고 도서관을 만든 데에는 분명한 생각이 있었기 때문일 터, 그것이 무엇일지가 궁금했습니다.

역시 장로님은 별 망설임 없이, 그러나 조금 전과는 달리 낮은 목소리로 대답을 하였습니다. “오늘의 나를 만든 것은 하버드대학의 졸업장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자라난 시골 작은 마을의 도서관이었다.” 했던 빌 게이츠의 말을 인용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누가 알겠습니까? 누군가가 내가 기증한 책 중에서 한 권을 읽고 이 시대를 이끌어나갈 사람이 100년 안에 한 사람만이라도 배출된다면 그것은 의미 있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장로님은 책을 기증한 것이 아니라 책이라는 희망의 씨앗을 기증한 것이었습니다.

한희철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