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은퇴 남편'의 비애

'은퇴 남편'의 비애

by 운영자 2011.11.25

‘검은 머리 파뿌리가 돼도 변치 않는 사랑’. 주례사의 단골 멘트가 아니다. 지난 주 방송된 KBS 1TV ‘인간극장 5부작’ ‘백발의 연인’ 조병만(94)․강계열(87) 노부부의 이야기다.

사랑이 무엇인지 잘 알지도 못하는 열네 살 어린 소녀와 가진 것도 배운 것 하나 없던 열아홉 살 청년이 만나 연지곤지 찍은 지 73년. 미운 정 고운정이 켜켜이 쌓인 세월 속에 ‘백년회로’를 다짐한 감정이 퇴색될 만 한 대도 그들의 사랑은 순백으로 빛나 훈훈한 감동을 준다.

노란 저고리에 자주색 고운 바지와 치마를 받쳐 입은 ‘커플 한복’차림으로 장날 나들이를 나가는 다정한 모습은 감나무에 남겨 놓은 까치밥처럼 명징한 풍경화다. 노부부의 일상은 바늘과 실이다.

텃밭을 나가도 함께 가고 개울가 빨래터에도 둘이 간다. 빨래하는 할머니에게 돌멩이를 던져 물보라를 튕기는 할아버지의 장난기는 천진난만한 어린아이를 닮았다. 시린 손을 호호 불어주는 할아버지와 “더 불어 달라”는 할머니의 어리광은 소꿉친구처럼 다정하다.

결혼을 앞둔 손녀에게 할머니는 장롱 깊이 감춰둔 보물 같은 ‘혼서지(婚書紙)’를 건네주며 당부한다. “마음 변하지 말고 할머니 할아버지처럼 살라고 주는 거다.

혼자만 잘해서 안 돼, 둘 다 잘해야지”. 노부부가 반려자를 위해 살아온 사랑의 실천적 철학이 고스란히 담겼다.

“다시 태어나도 서로밖에 없다”고 말하는 백발이 성성한 금실 좋은 노부부의 비결은 무엇일까? 질화로의 온기 같은 은근한 사랑과 변함없는 배려가 아닌가 싶다. 순박하고 천진한 성격이 소탈한 웃음에 묻어난다.

몸에 밴 노동과 부지런함, 청정지역의 산나물과 채식위주의 식단은 건강의 버팀목이다.

‘백발의 연인’이 훈훈한 감동을 준 지난주에는 여성 열 명 가운데 일곱 명이 "늙은 남편을 부담스러워한다"는 여론조사가 발표되어 극명하게 대비된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저출산·고령화 사회의 국민인식 조사'결과다.

심지어 같은 질문에 남성도 66.4%가 동의한 걸 보면 한국 남성들 스스로도 ‘나이 먹으면 아내에게 부담되는 존재’라고 자인(自認)한 셈이다.

매일 거실에서 빈둥거리는 ‘공포의 거실남’, 온종일 잠옷 차림으로 아내에게 걸려온 전화를 귀 쫑긋 세우고 엿듣는 ‘파자마맨’, 하루 세끼 밥 차려줘야 하는 ‘삼식(三食)이’, ‘비 오는 가을날 구두에 붙은 낙엽’ 등 은퇴해서 집에 있는 남편을 조롱하는 우스개는 오래전부터 있었지만 수치로 나타난 통계를 보니 여간 심각한 게 아니다.

평생 고생하며 가족들 먹여 살렸는데, 은퇴하고 돈 못 버니 찬밥신세로 전락해 씁쓸하다. 은퇴이후 함께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빚어지는 고령화 사회의 갈등이다.

퇴직이후 대부 분 집에서 보내는 옛 직장 동료는 무료함을 이기지 못해 “죽고 싶다”고 털어 놓을 정도다. 또 다른 동료는 자기계발 프로그램에 참석하며 주말 이외는 밖에서 활동하여 아내의 눈총에서 벗어난다.

아내의 부담감을 덜어주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가사노동의 분담과 함께 점심 한 끼라도 직접 차려 먹으면 ‘삼식이’ 대접은 면할 수 있다.

<시인ㆍ칼럼니스트> 이규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