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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더불어 사는 삶

'우리'…더불어 사는 삶

by 운영자 2012.02.14

2011년 겨울, 옥스퍼드 영어사전에 올해의 단어로 ‘쥐어짜진 중산층(squeezed middle)’을 뽑았다고 한다. 옥스퍼드 사전은 이 용어를 이렇게 설명했다.

“경제 위기에서 물가 상승, 임금 동결, 공공 지출 삭감 등에 특히 영향 받은 사회 계층으로, 주로 소득 수준이 낮거나 중간층인 사람들로 이뤄졌다.”

상위 몇 퍼센트에 속하는 부자들의 경제는 하늘과 맞닿을 정도이고, 가장 주류를 이루어야 할 중산층이 사라지고 하층만이 늘어난다는 뜻이다. 참으로 유쾌한 뉴스는 아니다.

몇 달전 미국 월가에서 시민들이 시위하고 있는데, 빌딩 발코니에서 금융인들이 시위대를 조롱하듯 쳐다보며 샴페인을 마시고 있는 모습이 뉴스를 통해 보도되었다.

나는 경제를 잘 모르지만, 오만하고 탐욕스러운 인간의 모습에 분노했었다. 자신들이 누리는 부의 특권을 누가 만들어 주었는가를 생각해봐야 하는데, 그런 사고에는 미치지 못하는가 보다.

경제가 어려워져 하층민이 늘어나는 이즈음, 간디의 일화가 떠오른다.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가 여행할 때의 일이다. 간디가 마침 기차에 올랐을 때 신발 한 짝이 벗겨져 플랫폼으로 떨어졌다.

그런데 이미 기차는 서서히 출발하려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 글을 읽는 독자는 간디와 같은 상황에 처했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급하게 기차에서 내려 신발을 주우러 달려가겠는가? 아니면 그냥 잃어버린 셈치고 포기하겠는가? 그렇다면 간디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

간디는 지체 없이 나머지 신발 한 짝을 벗어 먼저 신발이 떨어졌던 곳으로 던졌다. 주위 사람들이 놀라 ‘달려가서 주을 수도 있는데, 왜 그랬냐?’며 묻자, 간디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신발 각각의 한 짝들은 쓸모가 없지 않습니까? 누군가 신발 한 짝을 주우면 쓸모가 없을 겁니다. 그런데 두 짝을 주우면 쓸모가 있지 않습니까? 가난한 사람이 줍는다면 더욱 뜻 깊은 일이지요.”

부자로 유명했던 경주 최부자집의 최준은 어느 노스님께서 ‘재물은 분뇨와 같아서 한 곳에 축적되면 악취가 나고, 골고루 뿌려지면 땅을 비옥하게 하는 거름과 같다.’는 말을 듣고 재물의 가치를 잘 활용했다고 한다.

재산이란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해주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 재물을 삶의 수단과 방편으로 삼아야지 그 목적으로 삼는다면, 이런 사람은 돈의 노예로 살고 있는 것이다.

결국 재물이란 것도 가난한 이웃에게 되돌려주고 순환시켜야 하는 물건인 것이다. 조선말기의 최고 갑부였던 임상옥은 인생 말년에 이런 말을 하였다

“결국 가난한 소상업자가 있었기 때문에 내가 재산을 축적할 수 있었으니 이제는 그들에게 다시 돌려주어야 한다.”

바로 이 점이다. 경제인들은 누구로 인해서 자신의 재산을 축적할 수 있었는지를 생각한다면 당연히 돌려주어야 한다는 점이다.

나는 이 글을 통해 가난한 자에게 베풀라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삶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이고, 무엇을 하고자 함인가. 인간의 삶이란 자신 홀로만의 행복을 누려서는 안된다.

인류공동의 행복이어야 하고, ‘우리’라는 테두리 속에서 함께 하는 존재의식을 찾아보자는 것이다. 간디는 결코 부자가 아니었다.

인도의 사성제 계급에서도 평민층이요, 가난한 인도의 평범한 시민이었다. 간디의 나눔이라는 여유와 인간을 사랑하는 따뜻한 감정이 있었기에 사람들은 그를 마하트마(Mahatma, 위대한 영혼)라고 칭한 것이 아닐까?

정운 스님은 1982년 명우스님을 은사로 서울 성심사에 출가했다. 운문 승가대학을 졸업하고 동국대학교 선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2년간 미얀마 판디타라마 명상센터와 쉐우민 명상센터에서 위빠사나 수행을 했다. 저서로는 《붓다의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붓다의 가르침》 등이 있다.
정운<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