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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젖이 좋은 줄 알지만...

엄마젖이 좋은 줄 알지만...

by 운영자 2012.02.17

몸에서 푸른 기운이 빠져나갈 나이가 되면 “손자 보는 재미로 산다”고 한다. 자식이 자랄 때는 가장의 책무를 다하느라 바빠 돌볼 겨를이 없었으나 생활일선에서 은퇴한 실버세대들은 손자 보는 배역이라도 주어져 그나마 다행으로 여긴다.

딸과 사위가 외국으로 떠나면서 6개월만 맡아 키워 달라고 해 손자를 맡은 친구는 1년이 되도 대려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고 투덜거리기에 “비행기 편으로 보내라”는 우스개를 했다.

그러나 막상 외손자가 떠난 뒤 “하부지!”하며 안기던 모습이 눈에 밟힌다며 허전해 한다. 어떤 친구는 손자 보느라 모임에 자주 빠지자 “손자를 업고라도 나오라”는 친구들의 지청구를 들으면서도 손자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고 은근히 자랑 한다.

손자가 산후조리원에서 퇴원한 뒤 우리 내외는 덩달아 바빠졌다. 아내는 며느리의 식사를 챙기는가하면 아기를 목욕시킬 때면 보조역할을 한다. 일회용기저귀와 음식쓰레기가 쌓여 “식구 하나 늘었다고 쓰레기도 늘었다”는 푸념도 들뜬 목소리다.

3일이지나 동사무소에 출생신고를 하러갔다. 출생신고 양식도 많이 바뀌었다. 부모의 본을 한자로 기재해야하고, 본적지 주소는 새 주소로 표기하란다.

임신기간은 물론 아이가 태어날 때 몸무게까지 적어야하니 할아버지입장에서 난감하다. “출생신고가 이렇게 복잡해서 출산율이 적은가보다”고 담당직원에게 기분 좋은 농담을 하니 웃는다.

출생신고와 함께 손자의 주민등록번호가 적힌 등본 상단에 ‘출생을 진심으로 축하 한다“는 고무인을 찍어 준다. 대한민국 국적에 손자 이름을 올려 뿌듯하다.

며느리가 자연 분만한 것도 대견하지만 모유를 먹이는 게 기특하다. 신문기자 올챙이 시절, 중등학교 생물교과서를 집필한 교수의 ‘모유의 건강학’강의가 생생하게 떠오른다.

여성의 사회진출이 늘어나면서 아기에게 우유를 먹이는 산모가 점차 늘어나던 시기다. “아기에게 엄마 젖을 먹여야지 왜 소젖을 먹이느냐? 엄마젖은 아이 심성에 심대한 영향을 미친다”면서 “아이에게 ‘짐승 젖’을 먹이니 성격이 흉포해져 범죄가 늘고 기자들이 바빠졌다”고 일갈하던 기억이 새롭다.

생후 4∼6개월간 모유를 먹인 아이가 성장하여 ‘화를 덜 내고 덜 냉소적’이라는 연구 논문이 이를 뒷받침 한다. 최근 핀란드 투르쿠대학의 파이비 메르요넨 교수팀은 유아 2000명을 24세가 될 때까지 연구한 결과 조제유를 먹은 그룹은 생후 4~6개월 모유를 먹은 그룹에 비해 적대적인 성격에 냉소성과 편집성을 나타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엄마젖을 먹이면 아이의 소화력과 면역력을 높여주고 비만 차단과 지능개성은 물론 모성에니지의 흐름으로 성격마저 온화해진다는 것이 과학적으로 입증됐다.

또한 모유를 먹이는 경우 여성의 유방암에 걸릴 확률이 적으며 출산 후 체중 조절에도 도움을 준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일치된 견해다.

영국 등 선진국에서는 모유 수유실이 없는 공공건물은 아예 건축허가가 나오지 않을 정도로 모유수유를 권장하는 추세다.

우리나라도 모유먹이기 캠페인을 펼치고 있으나 공공장소에서 아기에게 젖을 물릴 수유시설을 늘리는 게 전제돼야 한다. 아기에게 젖을 물리는 엄마의 모습은 가장 아름다운 모성애다.

이규섭 시인은 시인,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경향신문을 거쳐 국민일보에서 편집부국장과 논설위원을 지냈다. KBS1라디오 ‘라디오 24시’에서 시사평론을 했다.
저서로는 《바람 멀미》 《판소리 답사 기행》 《사라지는 풍물》《별난 사람들》등이 있다.

이규섭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