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가깝고도 먼

가깝고도 먼

by 운영자 2012.05.02

지난주 3박 4일의 일정으로 일본을 다녀왔습니다. 지진과 방사능 공포 등 마음을 꺼림칙하게 하는 요인들이 있었지만, 그래도 관심 가는 곳을 둘러보기 위하여 길을 나섰습니다.

인천에서 비행기를 타니 목적지 후쿠오카까지는 한 시간 밖에는 걸리지가 않았습니다. 마음으로는 멀게만 느껴졌지만 실제로는 그렇게도 가까운 곳에 위치한 나라였습니다.

첫 번째 방문지는 오다야마 묘지였습니다. 버스로 이동을 하며 일본의 장례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우리와의 큰 차이점은 일본의 묘지들이 주택가 근처에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우리 같으면 혐오시설이라 하여 모두가 기피할 것 같은데, 일본에서는 조상들이 곁에서 자신들을 지켜준다고 생각하여 오히려 반긴다는 것이었습니다.
오다야마 공동묘지는 동네에서 멀지 않은 언덕 위에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묘지로 가기 위해 돌계단을 오르다보니 계단 옆으로는 파릇파릇한 풀들이 돋아나 있었습니다.

유심히 바라보니 무릇이었습니다. 배고팠던 어릴 적 구황식물로 무릇을 먹은 기억이 있습니다. 무릇의 잎과 알뿌리를 넣고 엿처럼 고아 먹던 아릿한 기억, 아리면서도 달짝지근했던 맛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바로 그 무릇이었습니다.

돌계단 옆 지천으로 솟아오른 무릇을 보며 마음이 아팠던 것은 저 언덕 위에 묻힌 선조들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굳이 첫 방문지로 오다야마 묘지를 택했던 것은 바로 그 묘지에 일본으로 징용을 끌려왔다 억울하게 죽은 선조들이 아무렇게나 묻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필시 강제 노역에 시달리며 배고픔을 참고 견뎌야 했던 그분들의 눈에 무릇이 눈에 띄지 않았을까, 어쩌면 저 흔한 무릇을 캐어 배고픔을 달래지 않았을까 싶었습니다.

일본에서 본 대개의 무덤이 그러했듯 오다야마 공동묘지 또한 대리석으로 잘 꾸며져 있었습니다. 세상을 떠난 이들이 다시 모여 또 하나의 마을을 이룬 듯했습니다. 누가 언제 다녀간 것인지 무덤 곳곳에는 다녀간 이들이 두고 간 꽃들도 흔하게 눈에 띄었습니다.

그 언덕 꼭대기에 조선인들의 무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기가 막힌 사연을 안고 그곳에 묻혀 있었습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두 번의 원자폭탄 투하로 일본은 마침내 항복을 선언하게 됩니다. 일본이 항복을 선언하자 일본에 강제징용으로 끌려온 선조들도 새로운 선택을 해야 했습니다.

그분들 중에는 어서 빨리 고국으로 돌아가려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밀린 노동급여를 받지 않아도 한시라도 빨리 고국으로 돌아가려 했던 그 심정이 얼마든지 느껴졌습니다.

얼마나 부모님이 보고 싶었을까, 부인과 자식이 있었다면 무얼 망설였을까, 꿈에나 볼 수 있었고 만날 수 있었던 그곳으로 가는데 무엇 주저할까, 억울함으로 치자면 남의 땅에 끌려와 강제로 고된 일을 한 것부터 돈 한 푼 받지 못한 일까지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어서 빨리 고국으로 고향으로 돌아가고픈 마음은 그 무엇으로도 막을 수가 없었던 것이었겠지요.

그들은 서둘러 배를 타고 일본을 떠났지만 결국은 고국에 돌아오지를 못했습니다. 폭풍이 그들의 앞길을 가로막았고, 배가 파선되면서 고국으로 향하던 그들도 발걸음도 거기서 멈춰졌습니다.

조선인들의 시신이 파도에 떠밀려오자 일본인들이 시신을 모아 묘지 언덕에 아무렇게 묻어둔 곳이 바로 그곳이었습니다. 그나마 시신을 수습해준 것에는 고마운 마음이 들었지만, 이렇다 할 묘비 하나 없이 아무렇게나 방치된 모습에는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렇게 일본은 첫날 첫 모습부터 가깝고도 먼 나라로 다가왔습니다.

한희철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