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희망이 욕망으로 변하면

희망이 욕망으로 변하면

by 운영자 2012.05.14

오래 전에 상영되었던 영화 “모래와 안개의 집”을 다시 보았다. 이 영화는 소유와 집착 때문에 파국을 맞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영화를 보면서 희망이 욕망으로 변할 때 파멸이 기다리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영화의 주인공들이 집착하는 집, 영화제목처럼 사상누각과도 같은 “모래와 안개의 집”은 집착과 사투 끝에 결국 그 누구의 소유도 되지 못한다.

희망에 대하여 집착하는 순간 희망은 욕망이 되고 결국 희망은 사라진다. 이제 너의 집도 나의 집도 아닌 채 모두의 희망은 끝나 버렸다.

참 우울한 영화이다. 대놓고 나쁜 짓 하는 사람 하나 없는데, 단지 행복을 누리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뿐인데 주인공들은 하나 같이 파멸에 이르고 만다.

단지 행복하려고 집을 소유하려 집착할 뿐이었다. 그러나 모래 위에 세워진 집과 안개 속에서, 소유에 대한 욕망으로 헤매는 그들에게서 행복은 낯선 이름이었다.

영화를 보면서 우울해지는 것은 이 비극적 결말에도 불구하고 소유에 대한 집착과 욕망은 결코 우리 곁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이란 사실 때문이다.

완전한 행복을 누리려면 소유의 욕망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소유의 욕망을 버릴 수 없다. 무소유를 외쳤던 간디나 법정을 비롯하여, 모든 인간은 소유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완전한 무소유란 불가능한 것이다. 소유를 포기한다면 결코 생존할 수 없다. 현세에서 생존이 부정된 내세에서의 행복이 무슨 소용이던가! 그야말로 실존적 한계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에서 비극적인 결말은 이미 예정돼 있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비극을 피하기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과연 소유의 욕망을 충족하면서도 행복할 수는 없는 것일까?

혹자는 적당히 소유하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면 그 “적당히”란 어느 정도를 말하는 것인가? 결국 행복과 소유에 관한 논의는 원점으로 돌아가고 만다. 그리고 마치 영화처럼 비극적 결말을 가벼이 여기며 또 다시 소유에 집착하게 된다.

과연 우리는 완전한 행복을 누릴 수 없는 것인가? 역설적이지만 행복하려면 완전한 행복을 포기해야 한다. 완전한 행복이란 이 세상에서는 절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완전한 행복은 천국이나 극락과 같은 저 세상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이 세상에서의 행복은 불완전한 것이다. 마치 아이들이 레고게임을 하듯 불행의 조각들과 행복의 조각들이 각자의 취향과 처지에 따라 꿰맞추어진 조합체인 것이다.

그러하기에 행복을 구성하기 위하여 불행의 조각을 감수해야 한다. 여기서 행복하면 불행하고 불행하면 행복하다는 역설도 성립된다.

다시 영화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소유의 욕망을 충족하면서도 행복할 방법은 없을까? 생존하기 위해 소유해야한다. 다만 소유하되 그 소유를 혼자 누리지 않고 함께 누리는 것이다.

꽃나무를 심어 다른 사람들과 함께 꽃향기를 누리듯이, 재능과 지식, 재물을 소유하되 다른 사람과 함께 향유한다면 행복할 수 있을 것이다. 무소유가 애당초 불가능한 것이라면, 자신의 소유를 다른 사람과 함께 향유하는 것이 이 세상에서의 행복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이성록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