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까시나무와 상
아까시나무와 상
by 운영자 2012.05.29
아까시나무는 여전히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이중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5월경에 피는 아까시나무의 꽃은 우리나라의 벌들이 가장 좋아하고, 아까시나무의 꽃을 먹은 벌들이 만든 꿀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많이 먹는다.
그러나 꽃이 지고 꿀벌을 다 먹고 나면 아까시나무의 존재를 부정한다. 우리나라 사람들 중에는 아까시나무가 일본제국주의가 한국의 산림을 황폐화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심었다고 믿고 있지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우리나라의 아까시나무는 역기능만큼 순기능도 적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특히 한 그루의 나무는 시대적 가치를 충분히 고려한 후에 평가해야만 한다. 그러나 한국인의 아까시나무에 대한 인식은 시대적인 평가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우리나라의 아까시나무는 이름부터 수난의 역사를 갖고 있다. 아카시아에 익숙한 사람들은 아까시나무의 이름부터 생소하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아까시나무보다 아카시아에 익숙하고, 신문과 방송에서는 여전히 아카시아로 부르는 경우가 많다.
아카시아와 아까시나무는 다른 나무이지만, 무슨 연유인지 모르지만 일찍부터 아끼시나무를 아카시아로 잘못 불러왔다. 아카시아를 아까시나무로 부른지는 그렇게 오래지 않다.
아카시아처럼 잘못 부른 나무의 이름을 비롯해서 인간은 상(相)에 사로잡히는 경우가 많다. 살면서 이런 상에 사로잡히지 않아야만 본체를 볼 수 있다.
어떤 상에 사로잡히지 않으려면 무엇보다도 존재 자체를 인정해야 한다. 아까시나무에 대한 한국인의 ‘상’은 이 나무의 자체를 인정하지 않은데서 연유한다. 나무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니 온갖 번뇌가 생성된다. 다른 나무처럼 아까시나무에 대해서도 선입견을 갖지 않고 만나면 다른 나무만큼 귀하다.
지난 일요일 집 근처 산에 오르니 아까시나무의 꽃이 길을 덮었다. 아끼시나무의 꽃을 밟고 산행하는 기분은 그 자체로 천국이자 극락이다.
산행에서 꽃길을 걷기란 정말 어렵다. 내가 사는 구암산에서도 유일하게 아까시나무의 꽃길만 만끽할 수 있다. 이처럼 아까시나무는 나에게 다른 나무들이 제공할 수 없는 꽃길을 선사한다.
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아까시나무 꽃길을 걸으면서 같은 과의 싸리를 만나 아까시나무의 안부도 전한다. 두 나무는 꽃 모양과 잎이 닮았다. 같은 과의 나무를 비교하다보면 각 나무의 특성을 이해할 수 있다.
산길을 걷다보면 썩어서 넘어진 나무들도 종종 만난다. 썩은 나무에는 개미를 비롯해서 많은 생명체들이 살고 있다. 나무는 죽어서도 다른 생명체들에게 삶의 터전을 제공한다.
죽은 나무의 모습에서 자연의 순환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다시 확인한다. 생강나무는 내가 자주 찾는 구암산에서 소나무 다음으로 많이 만나는 나무이다.
지금 쯤 생강나무를 만나면 초봄 추위에 떨면서 핀 노란 꽃이 잎 속에 숨어 있는 듯하다. 삼각으로 갈라진 잎에서 사라진 꽃을 생각하는 것도 나무를 사랑하는 방법 중 하나이다.
나무의 잎 속에 꽃이 있고, 꽃 속에 열매가 있다. 꽃은 사라지지 않는다. 꽃이 사라지는 순간 열매가 되고, 열매가 사라지는 순간 나무는 성장한다. 부처님 오신 날, 나무도 부처라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강판권 <교수>
그러나 꽃이 지고 꿀벌을 다 먹고 나면 아까시나무의 존재를 부정한다. 우리나라 사람들 중에는 아까시나무가 일본제국주의가 한국의 산림을 황폐화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심었다고 믿고 있지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우리나라의 아까시나무는 역기능만큼 순기능도 적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특히 한 그루의 나무는 시대적 가치를 충분히 고려한 후에 평가해야만 한다. 그러나 한국인의 아까시나무에 대한 인식은 시대적인 평가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우리나라의 아까시나무는 이름부터 수난의 역사를 갖고 있다. 아카시아에 익숙한 사람들은 아까시나무의 이름부터 생소하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아까시나무보다 아카시아에 익숙하고, 신문과 방송에서는 여전히 아카시아로 부르는 경우가 많다.
아카시아와 아까시나무는 다른 나무이지만, 무슨 연유인지 모르지만 일찍부터 아끼시나무를 아카시아로 잘못 불러왔다. 아카시아를 아까시나무로 부른지는 그렇게 오래지 않다.
아카시아처럼 잘못 부른 나무의 이름을 비롯해서 인간은 상(相)에 사로잡히는 경우가 많다. 살면서 이런 상에 사로잡히지 않아야만 본체를 볼 수 있다.
어떤 상에 사로잡히지 않으려면 무엇보다도 존재 자체를 인정해야 한다. 아까시나무에 대한 한국인의 ‘상’은 이 나무의 자체를 인정하지 않은데서 연유한다. 나무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니 온갖 번뇌가 생성된다. 다른 나무처럼 아까시나무에 대해서도 선입견을 갖지 않고 만나면 다른 나무만큼 귀하다.
지난 일요일 집 근처 산에 오르니 아까시나무의 꽃이 길을 덮었다. 아끼시나무의 꽃을 밟고 산행하는 기분은 그 자체로 천국이자 극락이다.
산행에서 꽃길을 걷기란 정말 어렵다. 내가 사는 구암산에서도 유일하게 아까시나무의 꽃길만 만끽할 수 있다. 이처럼 아까시나무는 나에게 다른 나무들이 제공할 수 없는 꽃길을 선사한다.
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아까시나무 꽃길을 걸으면서 같은 과의 싸리를 만나 아까시나무의 안부도 전한다. 두 나무는 꽃 모양과 잎이 닮았다. 같은 과의 나무를 비교하다보면 각 나무의 특성을 이해할 수 있다.
산길을 걷다보면 썩어서 넘어진 나무들도 종종 만난다. 썩은 나무에는 개미를 비롯해서 많은 생명체들이 살고 있다. 나무는 죽어서도 다른 생명체들에게 삶의 터전을 제공한다.
죽은 나무의 모습에서 자연의 순환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다시 확인한다. 생강나무는 내가 자주 찾는 구암산에서 소나무 다음으로 많이 만나는 나무이다.
지금 쯤 생강나무를 만나면 초봄 추위에 떨면서 핀 노란 꽃이 잎 속에 숨어 있는 듯하다. 삼각으로 갈라진 잎에서 사라진 꽃을 생각하는 것도 나무를 사랑하는 방법 중 하나이다.
나무의 잎 속에 꽃이 있고, 꽃 속에 열매가 있다. 꽃은 사라지지 않는다. 꽃이 사라지는 순간 열매가 되고, 열매가 사라지는 순간 나무는 성장한다. 부처님 오신 날, 나무도 부처라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강판권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