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창오리와 배롱나무
가창오리와 배롱나무
by 운영자 2012.07.12
나무는 평생 서 있어도 눕는 것을 꿈꾸지 않는다. 나무는 서있어도 누워있는 듯하기 때문이다. 나무가 평생 동안 서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뿌리로 잠을 자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무는 늘 자면서 서서 있는 존재다. 그러나 인간은 나무의 뿌리를 거의 볼 수 없기 때문에 나무가 눕는지를 모른다.
지금 남쪽에는 배롱나무 꽃이 한창이다. 나는 간혹 찾는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댐의 물가에 사는 부처꽃과의 배롱나무를 좋아한다. 물에 비친 배롱나무의 모습을 보노라면 황홀하다.
특히 배롱나무가 물속에 비친 산 그림자와 만나는 장면에서는 넋을 놓아야 한다. 내가 가창댐의 배롱나무와 만나는 시간을 좋아하는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가창오리 때문이다.
가창오리는 세계적인 희귀 새라서 멸종위기 동식물의 국제거래에 관한 협약에 수록되어 세계에서 보호받고 있지만, 댐 주변에는 오리관련 식당이 즐비하다. 물론 가창오리로 요리하는 것은 아니지만, 간판을 보는 순간 왠지 뒷맛이 씁쓸하다.
나무도 어떤 공간에서 만나느냐에 따라 느낌이 매우 다르다. 그래서 물가가 아닌 곳에서 배롱나무를 보다가 가창 댐 물가에서 살아가는 배롱나무를 만나면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해가 진 뒤 산 그림자가 짙게 깔리면 배롱나무의 꽃들도 활동을 멈추고 하루의 시간을 마무리한다. 혹 꽃이 바람에 떨어지면 꽃은 물결에 흔들흔들 정처 없이 떠다닌다. 나무는 뜻하지 않은 상황에 당황할 법도 하지만, 미동도 않는다.
자신의 몸이 떨어져나갔는데도 미동도 않는 것은 그 동안의 내공이 엄청나다는 것을 말한다. 자신의 몸이 떨어져나가면 누구든 가슴이 한없이 저리지만,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삶이 무상(無常)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늘 변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번뇌한다. 나무가 본의 아니게 꽃이 떨어져도 담담할 수 있는 것은 어차피 꽃은 떨어질 수밖에 없고, 심지어 그 꽃마저 자신의 소유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는 그 어떤 것도 소유할 수 없지만, 인간은 매일 소유에 허덕인다. 인간의 몸마저 소유지만 최소한의 소유라야 번뇌에서 벗어날 수 있다. 간혹 이곳저곳을 다니다보면 나무를 소유하는 것을 즐기는 분들을 만난다.
특히 분재에 관심을 갖는 분들의 경우 나무 소유욕이 강하다. 분재에 빠진 사람들 중에는 나무의 삶을 왜곡하여 경제적인 이익을 챙긴다. 그들은 나무를 애지중지한다지만 진정 그들이 좋아하는 것은 나무 자체가 아니라 이익이다.
나무의 존재를 경제적 가치에 두는 순간, 나무는 언젠가 그들에게 행복을 주지 않는다. 그들의 행복은 분재가 경제적 가치를 제공할 때만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이 이전보다 나무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지만, 사람들 중에는 나무의 가치를 존재에서 찾지 않고 다른 곳에서 찾는다.
나무에 대한 가치를 알려면 나무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필요하다. 나무의 정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나무의 생명체가 지니고 있는 존엄성에 대한 이해이다.
인간이 나무에 대한 존엄성을 깨닫는 순간, 행복은 그 만큼 늘어난다. 행복한 삶은 존재의 이유를 이해할 때 찾아온다.
강판권 <교수>
그래서 나무는 늘 자면서 서서 있는 존재다. 그러나 인간은 나무의 뿌리를 거의 볼 수 없기 때문에 나무가 눕는지를 모른다.
지금 남쪽에는 배롱나무 꽃이 한창이다. 나는 간혹 찾는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댐의 물가에 사는 부처꽃과의 배롱나무를 좋아한다. 물에 비친 배롱나무의 모습을 보노라면 황홀하다.
특히 배롱나무가 물속에 비친 산 그림자와 만나는 장면에서는 넋을 놓아야 한다. 내가 가창댐의 배롱나무와 만나는 시간을 좋아하는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가창오리 때문이다.
가창오리는 세계적인 희귀 새라서 멸종위기 동식물의 국제거래에 관한 협약에 수록되어 세계에서 보호받고 있지만, 댐 주변에는 오리관련 식당이 즐비하다. 물론 가창오리로 요리하는 것은 아니지만, 간판을 보는 순간 왠지 뒷맛이 씁쓸하다.
나무도 어떤 공간에서 만나느냐에 따라 느낌이 매우 다르다. 그래서 물가가 아닌 곳에서 배롱나무를 보다가 가창 댐 물가에서 살아가는 배롱나무를 만나면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해가 진 뒤 산 그림자가 짙게 깔리면 배롱나무의 꽃들도 활동을 멈추고 하루의 시간을 마무리한다. 혹 꽃이 바람에 떨어지면 꽃은 물결에 흔들흔들 정처 없이 떠다닌다. 나무는 뜻하지 않은 상황에 당황할 법도 하지만, 미동도 않는다.
자신의 몸이 떨어져나갔는데도 미동도 않는 것은 그 동안의 내공이 엄청나다는 것을 말한다. 자신의 몸이 떨어져나가면 누구든 가슴이 한없이 저리지만,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삶이 무상(無常)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늘 변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번뇌한다. 나무가 본의 아니게 꽃이 떨어져도 담담할 수 있는 것은 어차피 꽃은 떨어질 수밖에 없고, 심지어 그 꽃마저 자신의 소유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는 그 어떤 것도 소유할 수 없지만, 인간은 매일 소유에 허덕인다. 인간의 몸마저 소유지만 최소한의 소유라야 번뇌에서 벗어날 수 있다. 간혹 이곳저곳을 다니다보면 나무를 소유하는 것을 즐기는 분들을 만난다.
특히 분재에 관심을 갖는 분들의 경우 나무 소유욕이 강하다. 분재에 빠진 사람들 중에는 나무의 삶을 왜곡하여 경제적인 이익을 챙긴다. 그들은 나무를 애지중지한다지만 진정 그들이 좋아하는 것은 나무 자체가 아니라 이익이다.
나무의 존재를 경제적 가치에 두는 순간, 나무는 언젠가 그들에게 행복을 주지 않는다. 그들의 행복은 분재가 경제적 가치를 제공할 때만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이 이전보다 나무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지만, 사람들 중에는 나무의 가치를 존재에서 찾지 않고 다른 곳에서 찾는다.
나무에 대한 가치를 알려면 나무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필요하다. 나무의 정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나무의 생명체가 지니고 있는 존엄성에 대한 이해이다.
인간이 나무에 대한 존엄성을 깨닫는 순간, 행복은 그 만큼 늘어난다. 행복한 삶은 존재의 이유를 이해할 때 찾아온다.
강판권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