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갈공명의 진솔함
제갈공명의 진솔함
by 운영자 2012.07.24
나는 승려지만, 꼭 불교 책만 고집하지 않는다. 『삼국지』나 『수호지』를 비롯해 중국 역사 속에 등장하는 영웅이나 문인,철학자에 관한 책을 자주 접한다.
전공이 중국과 관련도 되지만, 젊은 학생들에게 강의하거나 글을 쓸 때 도움 되기 때문이다. 한편 그들의 인생을 통해 또 다른 삶의 양상을 배우기도 한다.
삶의 완성을 향한 치열한 구도자세, 학문하는 마음가짐, 아랫사람에 대한 배려의식, 그들만의 의리와 우정을 통해 삶의 진정성을 엿볼 수 있는 기회이다. 이런 인물 가운데 존경하는 사람이 『삼국지』에 등장하는 관우와 제갈공명이다.
중국 사천성의 수도 성도(成都)에 가면, 무후사(武侯祠)라는 관광지가 있다. 무후사는 제갈공명의 사당으로 5세기에 세워져 1500년의 역사를 간직한 관광지중 하나이다. 명나라 때는 공명의 묘가 유비를 모신 한소열묘(漢昭烈廟)에 합병되었지만, 재건할 당시에 건물을 두 곳으로 나누어 세웠다. 곧 무후사에는 황제인 유비와 신하인 공명이 함께 모셔져 있다.
중국에서는 황제를 천자(天子)라고 하는데, 그만큼 황제는 하늘의 아들이라고 칭할 만큼 대단한 권력을 가진 인물이요, 감히 신하와 나란히 할 수 없는 상층계급이다.
황제와 신하를 함께 모셨다고 하는 것은 중국인들이 제갈공명에 대한 존경의 의미로 보아도 될 듯 같다. 어쨌든 황제와 신하가 함께 모셔진 무후사는 중국에서 유일무이한 곳이라고 한다.
이 사천성을 여행할 때 마다 꼭 다녀오는 곳이다. 그러면 제갈공명이 어떤 인물이기에 황제와 나란히 할 수 있는 존재일까? 촉나라는 제갈공명이 아니었다면 유비가 나라를 건국할 수 없었고, 황제로 등극하는 일조차 불가능했을 것이다.
현재 중국 사천성 사람들은 촉나라 황제였던 유비보다 공명을 더 존경한다. 이 점은 공명이 그만큼 훌륭한 정치가이자 책략가이기도 하지만, 인간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삼국시대 때(A.D 3세기), ‘가정(街亭)’이란 곳은 촉나라와 위나라의 중요한 길목이었다. 가정에서 촉나라와 위나라가 싸울 때, 공명의 부하 마속이란 사람이 자신의 용맹만 믿고 제대로 싸우지 않아 촉나라에 큰 패배를 가져왔다. 이 때 공명은 군법에 따라 눈물을 흘리며 마속을 사형시켰지만 그의 혼을 달래주기 위해 제사를 지내고, 마속의 가솔들에게 그가 살았을 때와 똑같이 봉록을 내렸다.
한편 황제에게는 스스로 ‘자신이 부하를 잘못 다룬 과오도 있으니 자신의 벼슬을 깎아 내리게 하고, 신의 모자람과 그릇됨을 꾸짖어 달라’고 간곡한 청을 해서 벼슬이 3계급이나 내려졌다.
또 한번은 몇몇 사악한 사람들이 간사한 꾀로 공명을 헐뜯으며, 공명을 곤경에 빠뜨렸다. 후에 진실이 밝혀진 뒤, 황제 유비는 공명을 해친 간신들을 귀양 보냈다. 이런 일을 당하고도 공명은 그 간신들의 아들을 기용해 부친 대신 나라 일을 돌보게 하였다.
유비가 죽고 유비의 아들이 황제가 되었는데, 후주 황제는 허수아비 같은 군주였다. 유비보다는 겁약했으며 왕으로서의 위엄이 없었다. 공명은 얼마든지 마음만 먹으면 황제 자리에 오를 수 있었는데도, 유비와의 의리를 지키고자 후주 황제를 충성스럽게 섬겼다.
당시 위나라 조조는 후한의 신하로서 황제를 제거하고 본인이 제위에 오르게 된 경우인데, 공명의 처사와 비교될 수 밖에 없다.
공명이 죽고 그의 재산을 보니, 한 나라의 승상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재산이 겨우 뽕나무 8백 주와 밭 쉰 고랑이 전부였다고 하니, 사천성 사람들이 어찌 그를 존경하지 않겠는가? 나라를 위해 앞장서겠다는 ‘정치’라는 명분을 가진 사람들은 한번쯤 공명의 청렴결백함을 눈여겨 볼 일이다.
정운 <스님>
전공이 중국과 관련도 되지만, 젊은 학생들에게 강의하거나 글을 쓸 때 도움 되기 때문이다. 한편 그들의 인생을 통해 또 다른 삶의 양상을 배우기도 한다.
삶의 완성을 향한 치열한 구도자세, 학문하는 마음가짐, 아랫사람에 대한 배려의식, 그들만의 의리와 우정을 통해 삶의 진정성을 엿볼 수 있는 기회이다. 이런 인물 가운데 존경하는 사람이 『삼국지』에 등장하는 관우와 제갈공명이다.
중국 사천성의 수도 성도(成都)에 가면, 무후사(武侯祠)라는 관광지가 있다. 무후사는 제갈공명의 사당으로 5세기에 세워져 1500년의 역사를 간직한 관광지중 하나이다. 명나라 때는 공명의 묘가 유비를 모신 한소열묘(漢昭烈廟)에 합병되었지만, 재건할 당시에 건물을 두 곳으로 나누어 세웠다. 곧 무후사에는 황제인 유비와 신하인 공명이 함께 모셔져 있다.
중국에서는 황제를 천자(天子)라고 하는데, 그만큼 황제는 하늘의 아들이라고 칭할 만큼 대단한 권력을 가진 인물이요, 감히 신하와 나란히 할 수 없는 상층계급이다.
황제와 신하를 함께 모셨다고 하는 것은 중국인들이 제갈공명에 대한 존경의 의미로 보아도 될 듯 같다. 어쨌든 황제와 신하가 함께 모셔진 무후사는 중국에서 유일무이한 곳이라고 한다.
이 사천성을 여행할 때 마다 꼭 다녀오는 곳이다. 그러면 제갈공명이 어떤 인물이기에 황제와 나란히 할 수 있는 존재일까? 촉나라는 제갈공명이 아니었다면 유비가 나라를 건국할 수 없었고, 황제로 등극하는 일조차 불가능했을 것이다.
현재 중국 사천성 사람들은 촉나라 황제였던 유비보다 공명을 더 존경한다. 이 점은 공명이 그만큼 훌륭한 정치가이자 책략가이기도 하지만, 인간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삼국시대 때(A.D 3세기), ‘가정(街亭)’이란 곳은 촉나라와 위나라의 중요한 길목이었다. 가정에서 촉나라와 위나라가 싸울 때, 공명의 부하 마속이란 사람이 자신의 용맹만 믿고 제대로 싸우지 않아 촉나라에 큰 패배를 가져왔다. 이 때 공명은 군법에 따라 눈물을 흘리며 마속을 사형시켰지만 그의 혼을 달래주기 위해 제사를 지내고, 마속의 가솔들에게 그가 살았을 때와 똑같이 봉록을 내렸다.
한편 황제에게는 스스로 ‘자신이 부하를 잘못 다룬 과오도 있으니 자신의 벼슬을 깎아 내리게 하고, 신의 모자람과 그릇됨을 꾸짖어 달라’고 간곡한 청을 해서 벼슬이 3계급이나 내려졌다.
또 한번은 몇몇 사악한 사람들이 간사한 꾀로 공명을 헐뜯으며, 공명을 곤경에 빠뜨렸다. 후에 진실이 밝혀진 뒤, 황제 유비는 공명을 해친 간신들을 귀양 보냈다. 이런 일을 당하고도 공명은 그 간신들의 아들을 기용해 부친 대신 나라 일을 돌보게 하였다.
유비가 죽고 유비의 아들이 황제가 되었는데, 후주 황제는 허수아비 같은 군주였다. 유비보다는 겁약했으며 왕으로서의 위엄이 없었다. 공명은 얼마든지 마음만 먹으면 황제 자리에 오를 수 있었는데도, 유비와의 의리를 지키고자 후주 황제를 충성스럽게 섬겼다.
당시 위나라 조조는 후한의 신하로서 황제를 제거하고 본인이 제위에 오르게 된 경우인데, 공명의 처사와 비교될 수 밖에 없다.
공명이 죽고 그의 재산을 보니, 한 나라의 승상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재산이 겨우 뽕나무 8백 주와 밭 쉰 고랑이 전부였다고 하니, 사천성 사람들이 어찌 그를 존경하지 않겠는가? 나라를 위해 앞장서겠다는 ‘정치’라는 명분을 가진 사람들은 한번쯤 공명의 청렴결백함을 눈여겨 볼 일이다.
정운 <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