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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벼슬도 아닌 데…

나이가 벼슬도 아닌 데…

by 운영자 2012.09.21

오랜만에 추억의 열차를 타고 가을이 익어가는 들판을 달렸다. 지난 주말 충남 예산의 한 고등학교 NIE특강이 있어 장항선 무궁화 열차에 올랐다.

KTX, ITX 등 쾌속열차가 등장하고 역사는 현대식 건물로 새롭게 단장됐지만 덜컹거리며 달리는 장항선은 옛 정취 그대로다.

입석 승객들이 통로를 메우고 “KTX와 새마을 통과로 잠시 지체하겠다”며 빠른 열차를 먼저 보내는 느린 열차의 양보도 변함없다. 달라진 것은 예절 없고 배려 없는 승객의 편의주의적 모습들이 짜증나게 한다.

젊은 시절 홀로 여행을 떠날 때면 좌석 옆에 누가 앉을지 궁금했다. 이왕이면 예쁜 아가씨가 타기를 은근히 기대한다.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지루하지 않을뿐더러 같은 곳에서 내리게 되면 차 한잔의 제의도 거리낌 없이 할 수 있던 낭만의 시대였다.

남녀노소 구별 없이 옆자리에 누가 앉으면 “어디까지 가느냐”고 묻고 간단한 주전부리는 나누어 먹던 것이 예전의 열차 안 인정이었다.

영등포에서 열차를 타 예매한 좌석을 찾아가니 우락부락하게 생긴 중년의 사내가 의자를 뒤쪽으로 밀고 양말을 벗고 발을 뻗고 있어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조심스럽게 창가 자리에 가 앉았다. 자세로 봐서는 장거리 승객 같은데 평택역에서 내려 다행이다. 평택에서 승차해 옆자리 온 승객은 60대 중반의 ‘어르신’이다. 내게 의견은 물어 보지도 않고 창문의 커튼을 닫아버린다.

구름 사이로 간간히 햇살이 비칠 뿐 눈이 부신 것도 아니다. 충남평야를 가로지르는 가을 풍경을 못 보는 것도 아쉽고, 흐린 실내조명에 커튼까지 드리워져 신문을 읽기가 불편하다. 커튼을 살짝 들치고 불편한 자세로 신문을 읽었다. 일종의 침묵시위다. 미안했던지 눈을 감고 조는 척 한다.

불편함을 감수하며 삽교역에서 내렸다. 역사(驛舍)만 덩그렇게 지어져 있을 뿐 주변엔 편의점 하나 없는 벌판 한가운데로 한적하다. 읍내로 가려면 택시를 타거나 걸어야 한다.

마중 나온 선생님의 승용차를 타고 학교에 들러 2시간 강의를 마치고 상경열차에 오르니 더욱 혼잡하다. 통학생들과 입석 승객들로 통행로는 물론 열차 안까지 빼곡하게 서서 흔들리며 간다.

옆자리의 젊은이는 스마트폰 게임에 빠져 쳐다보지도 않는다. 강의를 함께 간 일행이 젊은이에게 자리를 바꿔달라고 제의했으나 주저하거나 망설임도 없이 단호하게 거절한다.

옆 좌석 동행자 곁에는 70대 노인이 앉아 있다. 삽교역에선 탄 아가씨가 노인에게 열차표를 보여주며 “제 자리인데요”하고 말했으나 일어나지 않는다.

마침 지나가던 승무원이 “여기는 전철이나 지하철 경로석이 아니기 때문에 일어나 주셔야 겠다”고 해도 “몸이 불편하다”는 핑계로 막무가내다. 결국 좌석 표를 예매한 아가씨는 서서 가고 노인은 큰소리로 전화까지 하며 영등포역에서 내린다.

노인을 ‘어르신’이라 부르고 노인의 법적 연령 기준을 높이려는 고령화 사회에서 어른 대접을 받으려면 남을 이해하고 배려하지는 못할망정 최소한의 공공질서와 공중예의는 지켜야 하는 게 아니가. 나이가 벼슬도 아닌데…

이규섭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