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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머물다 떠날 나그네 ?

잠시 머물다 떠날 나그네 ?

by 운영자 2012.10.16

학생들 수업 자료를 준비하다가 역대 인물들이 등장하면 어떤 사람이든 그 인물 옆에 괄호를 치고 생몰 연대를 꼭 기입한다. 대략 어느 시대 사람인지를 알아야 그 인물의 역사적, 문화적 배경을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도 수업 자료를 준비하면서 당나라 시대 스님의 생몰 연대를 기입하는 순간, 무언지 모르게 가슴이 먹먹했다. 내가 이렇게 수많은 사람의 생몰년을 기입하면서 ‘죽음이라는 것이 나와는 거리가 먼 것으로 여기구나’라고 생각이 문득 들었다.

수십년 이후에는 내 이름 옆에도 생몰연대가 기입될 것이 아닌가! 아니 나는 평범하게 살다간 승려일 테니 누가 내 이름을 거론하거나 생몰연대를 기입하지도 않을 것이다. 잠시 기억되었다가 곧 잊혀지리니.

절대 죽음이 두려운 것은 아니다. 불교 공부만 했기 때문에 죽음만큼은 어느 정도 초월해 있다(어쩌면 이 말도 나의 위선인지 모르지!).

내가 두려운 것은 언제 어떻게 갑자기 찾아올지도 모르는 죽음 앞에서 너무 헛되이 시간만 흘려보내고 있다는 자괴감이다. 진정 추구해야할 것은 따로 있건만 쓰잘 데 없는 것을 애타게 찾아 버둥거리며 살다가는 것은 아닌지....?

어떤 사람이 황량한 길을 걷다 미친 코끼리에 쫓겨 도망가다 우물에 빠졌다. 이 사람은 ‘코끼리로부터 해방되어 다행이다’라고 안심하고 아래를 보니, 그 우물 밑에 네 마리의 독사가 우글거리고 있었다.

이 사람은 엉겁결에 우물 옆에 있는 칡넝쿨을 붙잡았다. 밑으로 내려가자니 네 마리의 독사가 있고, 다시 올라가자니 미친 코끼리가 딱 버티고 서 있었다.

칡넝쿨을 잡고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죽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데, 설상가상으로 칡넝쿨을 검고 흰 두 마리 쥐가 갉아 먹고 있었다.

진퇴양난에 빠져 있던 이 사람은 ‘더 이상 살 수 없구나.’라고 절망하고 있는데, 마침 이 사람이 붙잡고 있던 칡넝쿨에서 꿀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 사람은 현 자신의 위급한 상황을 까마득히 잊고 꿀의 달콤한 맛에 취해 있었다.

이 내용은 불교 경전에 나오는 안수정등 이야기다. 우물에 빠진 사람은 어리석은 중생들, 미친 코끼리는 죽음, 독사는 육신을 구성하는 4대 요소(지수화풍), 두 마리 쥐는 낮과 밤을 상징하는 세월, 칡넝쿨은 죽지 않고 살겠다는 삶의 애착, 꿀은 끊임없이 솟아나오는 욕망을 비유한 것이다.

우리 모두는 늙음과 죽음이 쏜살같이 다가오는데도 달콤한 욕망에 빠져 그 다급함을 잊고 있다. 정당치 못한 그릇된 욕망을 부리다가 인간은 결국 허무하게 쓰러진다.

자신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닌 가족과 주위 사람들에게까지 피해를 주기도 한다. 삶 언저리를 다시한번 살펴봐야 하리라. 죽음은 어느 누구에게나 운명 지어진 피해갈 수 없는 약속이다. 당나라 때의 시인 왕범지는 이런 시를 읊은 적이 있다.

“몸은 큰 여인숙과 같고, 목숨이란 거리에서 하루 밤 묵는 나그네와 같다(身如大店家 命如一宿客).”

여관에 잠시 머물다 떠날 손님과 같은 우리네의 삶, 무엇을 그리도 애착할 것이 많은가!

정운 <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