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아랫목
마음의 아랫목
by 운영자 2012.12.12
세대를 구분하는 기준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 같습니다. 핸드폰을 쓰는 방법이나 범위를 보면 당장 세대 간의 차이가 납니다.
하도 시절이 어려워 밥을 제대로 먹을 수가 없었다 하면 젊은 세대는 라면이나 피자를 떠올리고는 하지요. 소나무 껍질을 벗겨 먹고 칡뿌리가 남아나질 않았던 초근목피의 시절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렇게 시대를 구분하는 기준 중에는 아랫목의 경험이 있을 것 같습니다. 절절 끓는 아랫목에 관한 정취를 알고 있는가 모르는가 하는 것은 어른 세대와 젊은 세대를 구분하는 충분한 기준이 될 듯합니다.
어른 세대들에겐 아랫목과 관련한 기억들이 적지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아버지에 대한 고마움이 떠오릅니다. 새벽녘 방이 추워진다 싶을 무렵, 새벽같이 일어난 아버지가 가마솥에 쇠죽을 쑤기 위해 불을 땝니다.
그 때 때는 불은 쇠죽만을 위한 불이 아니어서 식구들의 시린 등을 따뜻하게 해주고는 했습니다.
밖에 나갔다 늦게 들어오는 식구들의 밥이 보관되어 있던 곳도 아랫목이었습니다. 추운 날씨에 뒤늦게 들어오는 식구들을 위해 밥그릇을 아랫목 이불 속에 묻어두고는 했지요. 자칫 밥그릇을 차서 그릇이 엎어지면 이불에 붙어있는 밥풀을 뜯어먹던 기억들도 있습니다.
온 식구가 아랫목에 큰 이불을 펴고 발만 이불 속에 넣고 다함께 잠드는 것도 흔한 일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발이 따뜻해야 단잠을 잘 수 있었기에, 찬바람 앵앵 우는 겨울에는 온 식구가 한 이불에 발을 넣고 함께 잠들고는 했지요.
돌이켜보면 아랫목은 어른의 자리였고, 손님의 자리이기도 했습니다. 아이들은 아랫목에 앉아 있다가도 어른이 들어오시면 얼른 일어나 자리를 내드려야 했습니다.
손님이 오셔도 얼른 아랫목을 내어드리고는 했지요. 아랫목은 아무나 앉을 수 없는, 특별한 의미를 가진 자리였기 때문입니다.
‘윗방 아랫목에서는 안 얼어 죽어도 아랫방 윗목에서는 얼어 죽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예전에는 긴 방의 중간쯤을 벽으로 막아 윗방과 아랫방을 나누어 썼습니다.
불을 아궁이에서 때면 당연히 아랫방부터 뜨거워지기 시작합니다. 이치로 따지자면 아랫방 윗목이 윗방 아랫목보다 따뜻합니다. 왜냐하면 아랫방 윗목이 윗방 아랫목보다 아궁이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하기 때문이지요.
그래도 우리의 옛말을 보면 그렇지가 않습니다. 윗방 아랫목에서는 안 얼어 죽어도 아랫방 윗목에서는 얼어 죽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실제 온도와 상관없이 마음의 온도가 다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혹 등은 차가워도 아랫목에 있다 생각하면 마음이 따뜻했던 것이고, 등은 차갑지 않아도 윗목에 있다 생각하면 마음이 시렸던 것이지요.
아궁이도 사라지고, 아랫목도 윗목도 사라지고, 아랫목과 윗목에 얽힌 고유한 의미도 사라진 시대, 그럴수록 우리의 마음을 단박 녹일 마음의 아랫목이 그리워집니다.
<한희철 목사>
하도 시절이 어려워 밥을 제대로 먹을 수가 없었다 하면 젊은 세대는 라면이나 피자를 떠올리고는 하지요. 소나무 껍질을 벗겨 먹고 칡뿌리가 남아나질 않았던 초근목피의 시절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렇게 시대를 구분하는 기준 중에는 아랫목의 경험이 있을 것 같습니다. 절절 끓는 아랫목에 관한 정취를 알고 있는가 모르는가 하는 것은 어른 세대와 젊은 세대를 구분하는 충분한 기준이 될 듯합니다.
어른 세대들에겐 아랫목과 관련한 기억들이 적지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아버지에 대한 고마움이 떠오릅니다. 새벽녘 방이 추워진다 싶을 무렵, 새벽같이 일어난 아버지가 가마솥에 쇠죽을 쑤기 위해 불을 땝니다.
그 때 때는 불은 쇠죽만을 위한 불이 아니어서 식구들의 시린 등을 따뜻하게 해주고는 했습니다.
밖에 나갔다 늦게 들어오는 식구들의 밥이 보관되어 있던 곳도 아랫목이었습니다. 추운 날씨에 뒤늦게 들어오는 식구들을 위해 밥그릇을 아랫목 이불 속에 묻어두고는 했지요. 자칫 밥그릇을 차서 그릇이 엎어지면 이불에 붙어있는 밥풀을 뜯어먹던 기억들도 있습니다.
온 식구가 아랫목에 큰 이불을 펴고 발만 이불 속에 넣고 다함께 잠드는 것도 흔한 일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발이 따뜻해야 단잠을 잘 수 있었기에, 찬바람 앵앵 우는 겨울에는 온 식구가 한 이불에 발을 넣고 함께 잠들고는 했지요.
돌이켜보면 아랫목은 어른의 자리였고, 손님의 자리이기도 했습니다. 아이들은 아랫목에 앉아 있다가도 어른이 들어오시면 얼른 일어나 자리를 내드려야 했습니다.
손님이 오셔도 얼른 아랫목을 내어드리고는 했지요. 아랫목은 아무나 앉을 수 없는, 특별한 의미를 가진 자리였기 때문입니다.
‘윗방 아랫목에서는 안 얼어 죽어도 아랫방 윗목에서는 얼어 죽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예전에는 긴 방의 중간쯤을 벽으로 막아 윗방과 아랫방을 나누어 썼습니다.
불을 아궁이에서 때면 당연히 아랫방부터 뜨거워지기 시작합니다. 이치로 따지자면 아랫방 윗목이 윗방 아랫목보다 따뜻합니다. 왜냐하면 아랫방 윗목이 윗방 아랫목보다 아궁이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하기 때문이지요.
그래도 우리의 옛말을 보면 그렇지가 않습니다. 윗방 아랫목에서는 안 얼어 죽어도 아랫방 윗목에서는 얼어 죽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실제 온도와 상관없이 마음의 온도가 다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혹 등은 차가워도 아랫목에 있다 생각하면 마음이 따뜻했던 것이고, 등은 차갑지 않아도 윗목에 있다 생각하면 마음이 시렸던 것이지요.
아궁이도 사라지고, 아랫목도 윗목도 사라지고, 아랫목과 윗목에 얽힌 고유한 의미도 사라진 시대, 그럴수록 우리의 마음을 단박 녹일 마음의 아랫목이 그리워집니다.
<한희철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