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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그럴 수 있을까

나도 그럴 수 있을까

by 운영자 2013.01.09

이따금씩 텔레비전을 봅니다. 정해진 일과를 따라 지내다보면 그럴만한 시간이 없고 그럴 만한 마음도 크게 없어 즐겨보는 것은 아니지만, 마음이 편하고 쉬고 싶을 때 가벼운 마음으로 텔레비전을 켤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보게 되는 것이 대개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스포츠 중계이고, 다른 하나는 음악 연주입니다.

시대가 좋아져서 그런 것인지는 몰라도 언제 틀어도 클래식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채널이 두 개가 있어 즐겨 그곳을 찾게 됩니다.

연주만 들어도 좋은데 연주하는 모습을 직접 볼 수 있으니 음악을 듣는 즐거움이 더합니다. 유명한 연주 홀에서 유명한 지휘자와 악단, 혹은 연주자가 연주를 하는 모습을 보노라면 마치 내가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것 같은 호사를 누리게 된답니다

오늘 아침만 해도 그랬습니다. 아내가 아침상을 차리는 동안 클래식 방송을 틀었더니 마침 루빈스타인이 연주를 하고 있었습니다. 런던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와 생상의 곡을 협연하고 있었는데, 이내 연주에 빠져들었습니다.

백발이 성성한 마른 노인, 버스나 전철에서 만났다면 망설일 것도 없이 일어나 자리를 양보했을 것 같은 노인이 피아노 앞에 앉아 연주를 하고 있었습니다.

눈꺼풀이 거반 눈을 덮었을 뿐 아니라 눈을 감고 있는 순간도 많아 저러고서 어떻게 연주를 하나 싶은 생각이 드는데, 그가 치는 피아노곡은 강물 흘러가듯이 유유하기만 했습니다.

건반 위를 오가는 손놀림이 어찌나 기민하고 자유로운지, 손놀림만으로 보자면 피아노를 전혀 모르는 이가 장난삼아 다만 건반을 마구 두들겨대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습니다.

건반 위를 춤추듯 오가는 손은 한 눈에 보기에도 노인의 손이었습니다. 주름과 핏줄과 힘줄이 툭 툭 불거진, 매끄러움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울퉁불퉁한 손이었지요. 거칠게 드러난 나무의 뿌리 같기도 했습니다.

어떤 땐 세심하게 도자기를 빚는 도공의 손 같기도 했고, 조각도를 손에 잡고 작품을 새기는 화가 같기도 했고, 한바탕 소나기 쏟아진 숲에 이파리 끝에서 맑은 빗방울 연이어 떨어지는 것 같기도 했고, 어느 순간에는 홍학 떼의 군무를 보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활을 떠날 때부터 과녁을 향해 날아가야 하는 것을 잘 알고 있는 화살처럼, 샘을 떠날 때부터 바다를 향해 가야 하는 것을 익히 알고 있는 샘물처럼, 한없이 자유로운 손놀림은 어김없이 필요한 건반 위로 날아가 아름다운 선율을 빚어내고 있었지요.

춤을 추듯 자유로운 그의 연주 앞에 피아노 건반은 점점 작아져 그의 손 안으로 든 것처럼 보였고, 연주에 몰입한 그의 모습 속에서 음악의 세계는 한없이 확장되는 것 같았습니다.

한 사람이 자기 길을 성실하게 가면 그 길의 끝에서 얻게 되는 결과물이 어떤 것인지를 노(老) 연주자는 자신의 연주를 통해 보여주었습니다.

나도 내 길을 끝까지 걸으면 저렇게 잘 익은 열매 얻을 수 있을까, 연주는 어느새 나직한 질문으로 다가왔답니다.

<한희철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