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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나무와 ‘배리굿’

배나무와 ‘배리굿’

by 운영자 2013.04.22

매실나무꽃, 산수유꽃, 생강나무꽃, 살구꽃, 벚꽃, 조팝꽃, 진달래꽃 등 봄을 상징하는 꽃이 피고 지고 나면 어느새 여름이 다가온다. 그런데 봄꽃 중에서도 배나무 꽃은 같은 시기에 벚꽃 때문에 큰 관심을 끌지 못한다.

나는 중학교 시절 「청구영언(靑丘永言)」에 실린 이조년(李兆年, 1269-1343)의 시조 「다정가(多情歌)」를 통해 배나무에 얽힌 얘길 알았다.

이화(梨花)에 월백(月白)하고
은한(銀漢)이 삼경(三更)인제
일지춘심(一枝春心)을 자규(子規)야 알랴마는
다정(多情)도 병(病)인 냥하야 잠 못 들어 하노라

이조년의 시조에 등장하는 배꽃은 지금의 개량 배나무 꽃이 아니라 돌배나무 꽃이다.

접두어 ‘돌’은 동식물에 품종이 낮거나 저절로 난 야생을 뜻한다. 돌배나무나 산돌배나무의 한자는 산리(山梨)지만, 일반적으로 배나무를 나타내는 한자는 이(梨)다.

이는 나무의 성질이 물 흐르듯 이롭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보통 배나무를 의미하는 한자를 ‘배 리’로 읽는다.

그래서 나는 배나무 한자의 음이 좋아서 배나무의 정신을 ‘배리굿’이라고 부르고 싶다.

배나무는 대추나무와 더불어 책을 출판하는 판목(版木)에 가장 적합하여 ‘출판’을 의미한다.

돌배나무의 학명에는 이 나무의 특성을 드러내는 내용은 없다. 배나무의 다른 이름은 쾌과(快果), 과종(果宗), 옥유(玉乳), 밀부(蜜父)이고, 배나무 꽃의 한자는 이화(梨花)이다.

배나무의 꽃은 눈처럼 희기 때문에 ‘이화설(梨花雪)’이라 부른다. 눈처럼 흰 배꽃이 비처럼 떨어지는 것을 ‘이화우(梨花雨)’라 부른다.

나는 어린 시절 고향 뒷산에 살고 있는 돌배나무 위에서 자주 놀았다. 그러나 대부분 소먹이로 가서 놀았기 때문에 이 나무에서 핀 꽃을 본적이 없다.

돌배나무에 올라간 것은 아주 작은 열매를 따기 위해서였지만, 여름철 돌배나무의 열매는 설익어서 먹기가 쉽지 않다.

돌배나무는 완전히 익지 않으면 단단해서 쉽게 먹을 수가 없다.

돌배나무와 매우 비슷한 산돌배나무도 이 나무처럼 팔만대장경판을 만들 수 있을 만큼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다.

돌배나무는 열매에 꽃받침이 없고 열매의 색깔이 조금 진한 갈색으로 익지만, 산돌배나무는 열매에 꽃받침이 달려있고 색깔이 노랗게 익는다. 산에서 흔히 만나는 것은 주로 산돌배나무이다.

경북 울진군 서면 쌍전리의 산돌배나무(천연기념물 제408호)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 살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돌배는 약 4000년 전의 일산 신도시 선사시대유적이나 약 2000년 전의 경남 의창 다호리 가야고분에서 발견된 것처럼 아주 일찍부터 애용했다.

배꽃이 떨어지는 날, 꽃비를 맞으면서 느긋하게 보낼 수 있는 날은 언제일까. 달을 닮은 배꽃을 바라보면서 저녁 시간을 맞을 날은 언제일까. 바로 배꽃이 만발한 오늘이다.

오늘 즐기지 않으면 영원히 즐길 수 없을지도 모른다.

<강판권 교수>